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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Beyond Superflat Urbanism (Korean)

2020, Architectural Critics Association (건축평단)

An essay published at a journal titled Architectural Critics Association (건축평단), the Spring Issue 2020: pp. 243-260.

수퍼플랫 어버니즘을 넘어 술미 과축건 백승한 1998년에 출판된 일본 사진작가 타카시 홈마Takashi Homma의 작품집 『동경 교외 Tokyo Suburbia』에 수록된 사진들은, 버블 경제로 성장하던 당시 일본의 도시문화에 대해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며 다소 무심한 방식으로 접근하는 작가의 태도를 느낄 수 있는 사례이다.1 홈마는 교외에 위치한 아파트와 주택단지의 한적한 풍경, 버려진 패스트푸드 음식만 남겨진 야외 주차장, 야간의 화려한 불꽃놀이, 한적한 여느 미국 거리에서 마주할 법한 ‘조나단Jonathan’이라는 상호가 새겨진 음식점 간판, 그리고 맥도널드에서 햄버거를 먹는 어떤 남성과 오락실에서 게임을 하는 아이들의 모습 등 일상생활의 순간들을 포착한다(그림 1-4). 사진 속 풍경은 공허하게 느껴진다. 하늘에 쏘아 올린 불꽃놀이는 밤하늘을 화려하게 뒤덮지만, 멀리서 조망된 탓에 구경하는 사람들의 열기나 축제의 분위기 등을 느끼기는 어렵다. ‘합류’라고 새겨진 고속도로 아스팔트 바닥에 새겨진 하얀색 타이포그래피는 보는 이에게 선명하고 깨끗하게 다가온다. 한적한 도로 합류지점 풍경은 마치 시간이 정지한 둣한 느낌을 주며, 이 때문에 파란색과 주황색 그리고 빨간 색의 도로 표지판 색채가 더 강렬하고 기이하게 다가온다. 누군가 주차장에 성의 없이 두고 간 패스트푸드 음식쓰레기는 마치 아무도 없는 텅 빈 공간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의 모습처럼 보인다. “홈마의 1 Takashi Homma, Momoyo Kaijima, and Shinji Miyadai, Takashi Homma: Tokyo Suburbia (Tokyo: Edité par Korinsha Press, 1998). 수퍼플랫 어버니즘을 넘어 | 백승한 243 1~4 타카시 홈마 (Takashi Homma)의 작품집 『동경 교외 Tokyo Suburbia』 (1998)에 수록된 사진 ©Takashi Homma 동경은 과거의 흔적을 거의 지니고 있지 않다”는 마크 퓨스텔Marc Feustel의 설명처럼, 그의 사진은 특정 시공간에서부터 분리되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느낌을 자아낸다.2 또한 퓨스텔은 홈마의 사진에 특징적인 “침묵하는 톤muted tones의 사용은 [그가 탐구하는] 주제에 대한 낭만화를 피하고 [그보다] 일상적이고 진부한 특징을 두드러지게” 하며, 또한 홈마의 “형식주의는 분리와 거리의 감각을 촉발하고 포착된 이미지를 미묘한 슬픔으로 물들”이며 보는 이로 하여금 “납작함flatness과 비어있음emptiness에 대해 조금 낙심한 느낌”을 전달한다고 설명한다.3 본고는 퓨스텔이 말하는 “납작함”의 의미에 주목하며, 이를 당대 일본의 예술과 건축 실천에 큰 영향을 미친 ‘수퍼플랫superflat’ 운동의 1 교차점 속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나아가 수퍼플랫의 동시대적 의미를 탐구하는 맥락에서, 글의 후반부에서 수퍼플랫 어버니즘superflat urbanism 논의에 자주 등장하는 큐-프런트Q-Front 건물을 재조명한다. ‘초-납작함’ 2 3 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 용어 ‘수퍼플랫’은 2차 대전 이후 성장하던 일본 경제가 붕괴하던 1990년대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촉발하였으며, 소비문화에 대한 열린 관점을 제시하였다. 아래의 인용문은 수퍼플랫에 대한 한 정의이다. “[슈퍼플랫은 다카시] 무라카미에 의해 고안된 용어로서, 고급과 저급 예술의 포스트모던한 병합을 뜻한다. 슈퍼플랫 스타일은 일본의 그래픽 미술, 애니메anime와 망가manga에 등장하는 특정 2차원의 형태를 수반하며, 서양의 투시도적 기술을 무시한다. 이러한 형식적 특성을 넘어서, 슈퍼플랫은 또한 일본 소비문화의 피상적인 비어있음을 지칭한다.”4 4 수퍼플랫은 서구 르네상스 미술의 투시도 개념을 비판적으로 수용한다는 측면에서 일본미술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미술사조이다. 데이브 베뇬Dave Beynon에 2 3 4 따르면, 수퍼플랫함의 미학적 특성은 “일본 전통과 서구 건축적 Marc Feustel, “Adrift in the City of Superflat” (pp. 72-74), Foam Magazine 23, Summer 2010: 72. Feustel, 같은 글, 73. Feustel, 같은 글, 74. 수퍼플랫 어버니즘을 넘어 | 백승한 245 계승의 혼합으로부터” 유래한다.5 또한 수퍼플랫 운동은 “1990년대 그가 말하는 초-납작하고 2차원적인 세계에서 티브이와 인터넷, 그리고 초반의 눈부신 성장, 1995 년 1월의 한신·아와지 대지진, 그리고 같은 망가와 애니메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생산되고 순환되는 표류하는 해 3월 종교단체 옴진리교의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살포사건”과 같은 이미지들은 지배적 역할을 한다. 수퍼플랫 운동의 주요 인물은 포스트-버블 시대 일본 사회에서 발생한 비극적 사건과 마주함에 따라 무라카미를 포함하여, 요시모토 나라Yoshimoto Nara, 치호 아오시마Chiho 사람들이 느끼는 무기력, 그리고 기존의 사회의 도덕과 작동 방식에 대한 Aoshima, 치낫수 반Chinatsu Ban, 아야 타카노Aya Takano 등을 포함한다. 무라카미의 2002년 작품 〈꽃 공 Flower Ball〉은 해바라기와 같은 비판의식에서 기인한다. 일례로 현재 활발하게 활동 중인 “융합적 아트 6 콜렉티브” 팀랩teamLab은 수퍼플랫 운동의 현대적 버전이라고 할 수 꽃의 형상을 한 웃는 얼굴들이 만화적으로 묘사되어 화면의 전부를 있는데, 미술사학자 유키오 리핏Yukio Lippit에 따르면 이들은 “1990년대와 뒤덮고 있다(그림 5). 화면 중앙에는 상대적으로 큰 스케일의 공이 2000년대 일본의 기술진화와 미디어 서브컬처 사이에서 태어난 위치하고 있으며, 그 표면에는 비슷한 패턴의 웃는 꽃 얼굴 형상이 밀레니엄 세대를 반영한다.” 하지만 팀랩을 포함한 수퍼플랫 작가들은 빼곡히 배치되어 있다. 꽃 얼굴의 형상은 복사 빛 붙여넣기를 통해 포스트-버블 일본사회를 무조건적으로 비판하기보다 “이러한 소비가 대량생산된 것처럼 보이지만, 각 형상의 색채의 구성과 조합은 생성하는 창조성”에 주목하며, 전통과 근대 사이의 관계성을 더 유연한 제각각이다. 마치 공장의 대량생산 체제 속에서 만들어지는 꽃에 나름의 방식으로 접근한다. 다음은 수퍼플랫 운동을 주창한 다카시 무라카미가 다양성이 부여되는 것처럼, 어느 연구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보는 2000년도에 발표한 수퍼플랫 선언문 중 일부이다. 이는 “이들의 ‘귀여운 웃음’ 이면에 함축되어 있는 고밀도의 도시에서 7 8 사이버펑크적 삶을 살고 있는 일본인들의 정서와 마주하게 된다.”10 아오시마의 2005년 작품 〈도시 불빛 City Glow〉은 기이한 “사회, 관습, 미술, 문화. 이 모두는 극단적으로 2차원적이다. 5 6 7 8 이러한 2차원성은 특히 예술 분야에서 두드러지며, 그에 도시풍경을 묘사한다(그림 6). 화면 속 초고층 빌딩들은 마치 수반하는 감수성은 일본 역사의 표면 아래에서 꾸준하게 지렁이처럼 흐느적거리고 있으며, 빌딩의 상부에 여성의 얼굴이 그려져 흘러오고 있다. … (중략) … 본 책은 일본 문화의 구축에 있어 사람의 모습을 한 인공 구축물에 의해 구성되는 도시경관을 기여했고 여전히 기여하고 있는 감수성인 초 납작함을 묘사한다. 화면의 아래에는 밤 시간대에도 불구하고 두드러지게 밝은 하나의 세계관으로 간주하기를 희망하며, 또한 [이를 통해 빛을 받는 다양한 꽃들로 구성된 풍경이 위치하며, 화면 위 밤하늘은 수퍼플랫이] 과거를 현재와 미래와 연결시키는 독자적 많은 별들이 화려하게 빛나고 있다. 사람을 닮은 흐느적거리는 개념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 (중략) … ‘초 납작함’은 빌딩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귀엽다는 생각을 자아내게 할 수 완전하게 서구화된 일본인들의 고유한 개념이다.” 있는 한편, 작품의 메시지는 반드시 이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인간을 9 Dave Beynon, “Superflat Architecture: Culture and Dimensionality” (pp. 1-9), Interspaces: Art + Architectural Exchanges from East to West Conference 2010 (2010년 8월 20-22일 Melbourne University에서 열린 컨퍼런스 프로시딩): 1. Yukio Lippit, “teamLab: Past, Present, and Future” (2016년 2월 6일부터 12월 18일까지 PACE Art + Technology에서 열린 팀랩의 전시 리뷰), 출처: http://exhibition.team-lab.net/siliconvalley/ review (2019년 1월 16일 검색). Lippit, 위의 글; 덧붙여 필자는 팀랩에 대한 연구논문을 최근 발표한 바 있다: 백승한, 「디지털 자연, 혹은 평평함의 윤리: 팀랩의 설치작업 분석을 중심으로」, 『서양미술사학회 논문집』 50, 2019년 2월: pp. 57-82. 본 인용문의 저자인 퓨스텔이 소비문화의 창조성을 표현함에 있어 영단어 ‘기리다(celebrate)’를 사용한다. 건축과 미술 246 닮은 마천루들이 별과 꽃, 그리고 풀들과 기이한 방식으로 공존하는 상황을 연출하는 작가는, 오히려 대도시 현실에서 “인류와 자연이 공존하기 어렵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였다고 말한다.11 만화적 9 10 Murakami Takashi, Super Flat (Tokyo: Madra Publishing, 2000): 5. 다음 문헌에서 재인용: Marc Steinberg, Emerging from Flatness: Murakami Takashi and Superflat Aesthetics, M.A. Thesis for McGill University, 2002: 2. 김민수, 「무능현실 전능예술의 역설 : 오타쿠 문화와 무라카미 다카시로 본 일본」 (pp. 90-125), 『일본비평』, vol.5, 2011년 8월: p. 114. 수퍼플랫 어버니즘을 넘어 | 백승한 247 5 무라카미 타카시 (Murakami Takashi), 〈꽃 공 Flower Ball〉 (2002). ©Murakami Takashi 6 치호 아오시마 (Chiho Aoshima), 〈도시 불빛 City Glow〉 (2005). ©Chiho Aoshima 5 느낌을 자아내는 스타일 때문에 〈도시 불빛〉은 형식적으로 수퍼플랫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으며, 특히 아오시마는 스케치를 아도비 일러스트레이터를 사용하여 “우키오에ukiyo-e의 선적 미학의 재-차용”을 시도한다.12 이에 따라 그의 작업에서 생성되는 만화적 도시 이미지는 선적이고 평면적인데, 이는 흥미롭게도 (그리드 시스템의 도시계획과 모더니스트적인 건축 어법 등) 전형적인 도시·건축 문법이 해체되어 그 정체를 쉽게 파악하기 어려운 “종말 이후의 미래”를 그려낸다. 포스트-버블 일본 사회라는 맥락에서 그리고 우키오에와 같은 전통미술과의 연관성 속에서 발전한 수퍼플랫은 다카시가 말하는 것처럼 분명 ‘일본적’이지만, 그것이 참조하는 평평함 혹은 납작함의 윤리는 더 넓은 차원에서 탐구될 수 있으며, 요즘의 한국에서도 비슷하면서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2015년에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뉴 스킨: 본뜨고 연결하기〉는 대표적 사례이다. 강동주, 강정석, 김동희, 김영수, 김희천, 그리고 박민하가 참여한 전시는, “과잉된 IT 열풍과 PC방 문화, 6 그리고 스마트폰의 보급”의 영향을 받으면서 “마치 게임 속에서 현현된 가상의 지형을 돌아다니며 아이템을 사 모으는 게임의 시나리오”와 같은 종류의 작업을 선보인다.13 〈뉴 스킨〉 전에 전시된 강정석의 작업 일부를 짧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의 영상 시리즈 〈Simulating Surface A, 2014〉와 〈Simulating Surface B, 2014〉는 ‘안선생’이라고 불리는 친구와 서울의 어느 지하철역 개찰구에서 짧은 만남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14 바쁜 오전 출근 시간에 헤어지면서 손을 흔드는 안선생의 ‘손’은, 그 이후의 작업의 중요한 모티브가 되어 반복적이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등장한다. 〈Simulating Surface A〉에서는 가공되지 않은 일상생활의 장면으로 영상의 중간 중간에 삽입되어 우정 혹은 친밀함의 정서를 환기시키는 장치가 되는 한편, 〈Simulating Surface B〉에서는 파편화될 뿐 아니라 11 12 13 14 The Art History 웹페이지에 게시된 수퍼플랫의 소개, 출처: https://www.theartstory.org, 2019년 7월 22일 접근. 위 웹페이지, 2019년 7월 22일 접근. 일민미술관 웹페이지 전시설명, 출처: http://ilmin.org/kr/exhibition/new-skin-modeling-andattaching/, 2019년 8월 10일 접근. 강정석의 대부분 영상은 그의 유투브 페이지에서 시청 가능하다 (작가의 유투브 아이디: ‘禁区b d’): https://www.youtube.com/channel/UCF7_GLDCKMd6sgIg2u_5Xlw. 수퍼플랫 어버니즘을 넘어 | 백승한 249 전혀 다른 맥락에서 재탄생한다. 온라인 게임 인터페이스를 연상시키는 서술한다.17 첫째, “일련의 전자 디스플레이 스크린에 의해 구성되는 도시 영상 속 화면에서 나머지 신체 부위와 완전히 차단된 채, 정체를 알 장면의 파편화, 그리고 그러한 태블릿 스크린 뒤에 존재하는 정보 세계의 수 없는 기계 이미지의 반복적 중첩, 자기복제와 뒤틀림 등의 과정이 가상적 평등에 대한 공통의 추구”이다. 둘째, “내부와 외부 사이의 만들어내는 기이한 세계 속에 위치한다. 그 결과 친숙하고 정겨운 친구의 위계를 허물고, 파편화시키며, 정면성을 제거함에 따라 도시 수립에 가장 신체 부위는 사이버스페이스에서 표류하는 오브제가 되어 버린다. 중요한 요소인 건물의 존재감을 지우는 것이다.”18 비슷한 맥락에서 비평가 타로 이가라시Taro Igarashi는 수퍼플랫을 하지만 강정석은 그의 작업을 통해 디지털화된 안선생의 손, 다르게 말해 디지털 힘에 포섭된 일상생활의 층위를 단순히 받아들이기보다, “이미 존재하는 위계가 붕괴된 세계관”으로 파악하며, 이를 바탕으로 이를 통해 만지고 느낄 수 있는tactile 일상생활 세계 그리고 디지털 세계 일본 도시경관과 건축 디자인의 경향에 대해 논의한다.19 이가라시에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를 끊임없이 고민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디지털 따르면 “일본 건축 디자인은 특히 1990년대 이후 3차원적 형태 대신 세계에서 중심을 잃고 부유하는 상황에 직면하는 자신에게 확신에 평평한 표면에 점점 더 초점을 맞추어오고” 있으며, “구조는 그 자체로서 찬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또 다른 동료 작가 김희천이 새로운 장식의 형태”가 되었다.20 이들이 말하는 수퍼플랫 건축 사례는 말하는 것처럼 “현실세계와 가상세계가 딱 붙어 있다”는 의견에 쉽게 주로 토요 이토, 쿠마 켄고, 아오키 준, 사나SANAA, 이누이 쿠미코, 동의하지는 않는 듯하다. 그보다 강정석에게 ‘뉴 스킨’이란, 호기심과 아틀리에 보우-와우, 그리고 이시카미 준야 등을 포함한다.21 15 장과 이가라시의 글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는 사례들은 주로 때로는 경이로움을 불러일으키는 디지털 (혹은 포스트-미디엄) 시대의 새로운 삶의 형식이면서, 그와 동시에 이로 인해 기존의 습관과 기억, 특정 브랜드 이미지를 제고하는 맥락에서 외피 디자인에 집중하는 건축 신체의 수행성이 간섭받고 왜곡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공존하는 작품들을 포함한다. 일례로 카즈요 세지마는 〈불투명한 긴자 1998〉에서 복합적 현상에 가깝다. 필자는 위 사례를 통해 〈뉴 스킨〉 전으로 이중 유리 외피의 설치를 통해 안에서 바깥으로 빛을 투과시키며 해당 대표되는 국내의 매체 기반 미술 동향이 수퍼플랫 운동과 긴밀한 관계에 건물에 입주한 브랜드 상호 ‘opaque’를 돋보이게 하는 전략을 취한다.22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기보다, 양자 모두 표면의 존재론적 차원을 비슷한 방식으로 이누이 쿠미코(Inui Architects)의 〈Dior Ginza 2004〉 탐구한다는 측면에서 어느 정도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음에 주목한다. 17 16 수퍼플랫 운동은 주로 미술계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도시담론으로도 발전하였는데, 중국의 건축학자 지키 장Ziqi Zhang은 2016년의 한 발표에서 수퍼플랫 어버니즘 현상의 이론화를 시도하였다. 2000년 전후 일본건축의 특징을 “깊이 없음의 상태a state of no depth”로 간주하면서, 장은 수퍼플랫 어버니즘의 두 가지 특징을 다음과 같이 15 16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작품설명, 출처: https://www.mmca.go.kr/collections/ collectionsDetail.do?wrkMngNo=NM-07887 (2019년 8월 9일 접근). 윤향로의 작업은 플랫한 세계의 감각을 2차원 평면에 구현하는 또 다른 사례이다. 그의 2017년 작품 〈Screenshot 5.02.11-1〉은 온라인 공간에서 떠돌아다니는 이미지들의 조합을 통해 만들어진다. 그의 작품에서 원래의 이미지들이 참조하는 원본성을 추적하기는 어렵다. 본 작업에서 원본 이미지의 구체적인 형상은 제거되었다. 남은 것은 추상적인 실루엣과 윤곽 등이며, 이는 참조 대상을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은 채 새로운 이를 둘러싼 시각적인 비틀림을 통해 새로운 시각문화의 층위를 생산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반영한다. 건축과 미술 250 18 19 20 21 22 Ziqi Zhang, “A Study on the Super-flat Urbanism in Japan,” Presentation Paper from The 17th International Planning History Society Conference Proceeding (2016년 7월 17일에서 21일까지 네덜란드 델프트에서 열린 학회 프로시딩 페이퍼) (페이지 번호 없음). Zhang, 같은 글. Taro Igarashi, “The Post-bubble City and Japan’s New Wave of International Design,” Discuss Japan: Japan Foreign Policy Forum, 2011년 3월 30일 게시, 출처: https:// www.japanpolicyforum.jp, 2019년 7월 22일 접근. Igarashi, 위의 글. 장과 이가라시가 그들의 글에서 제시하는 구체적인 수퍼플랫 건축 사례는 다음을 포함한다: 시부야 역의 〈큐-프런트 Q-Front〉 빌딩 (1999), 카즈요 세지마(Kazuyo Sejima)의 〈불투명한 긴자 Opaque Ginza〉 (1998) 그리고 〈hhstyle.com 빌딩 hhstyle.com Building〉 (2000), 토요 이토(Toyo Ito & Associates)의 〈다이샤 문화 센터 Daisya Cultural Center〉 (2000), 쿠마 켄고(Kuma Kengo)의 〈JR 시부야 역 파사드 리노베이션 JR Shibuya Station Façade Renovation〉 (2003), 아오키 준(Aoki Jun)의 〈루이뷔통 긴자 마츠야 스토어 Louis Vuitton Ginza Matsuya Store〉 (2000), 사나(SANAA)의 〈21세기 미술관 21st Century Museum of Contemporary Art〉 (2004), 이누이 쿠미코(Inui Architects)의 〈Dior Ginza〉 (2004), 토요 이토(Toyo Ito)의 〈토드의 오모테산도 건물 TOD’s Omotesando Building〉 (2005), 사나의 〈모리야마 하우스 Moriyama House〉 (2005), 아틀리에 보우-와우(Atelier bow-Wow)의 〈미니 하우스 Mini House〉 (2005), 그리고 이시카미 준야(Ishikami Junya)의 〈극단적 자연 Extreme Nature〉 (2008). Igarashi, 위의 글. 수퍼플랫 어버니즘을 넘어 | 백승한 251 7 7 역시 건물 외피를 타공 방식으로 마감하며 그림자의 음영을 통해 (2005). ©백승한 일련의 그리드 및 대각선 띠를 강조한다. 세지마와 쿠미코의 작업에서 8 노리히코 단 (Norihiko Dan and Associates), 〈오모테산도 케야키 빌딩 두드러지는 점들 중 하나는 ‘가벼움’이며, “건물의 존재감”이 브랜드의 Omotesando Keyaki Building〉 (2013). ©백승한 주목을 위해 전략적으로 후퇴하는 제스처를 나타낸다. 9,10 〈토드의 오모테산도 빌딩〉과 필자는 위 사례들 중 하나인 토요 이토의 〈토드TOD의 오모테산도 〈오모테산도 케야키 빌딩〉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 ©백승한 빌딩 2005〉을 방문한 적이 있으며, 이를 장과 이가라시가 주장하는 수퍼플랫 논의와 비교해 접근하고자 한다(그림 7). 시부야 패션 중심지역들 중 하나인 오모테산토 지하철역 바로 앞에 위치한 본 건물은 L자 모양의 배치 형태를 지니며, 장이 설명하는 것처럼 정면성이 두드러지지 않는 외피 디자인이 특징이다. L자 모양의 매스를 감싸는 외피 전반에 많은 지그재그의 선들이 콘크리트로 마감된 외벽 지지체가 되어 건물 이미지를 구성하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이토의 ‘L’자 매스를 둘러싼 외벽은 총 6개로 모두 비슷한 모습을 띠고 있는데, 그가 전/후/좌/우의 차이를 의도적으로 부정하는 디자인 전략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해당 부지에는 휴고보스가 입점한 또 다른 상업건물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는 기존의 이토 건물이 새로 만들어진 보스 건물을 감싸는 상황을 연출한다. 새로 추가된 건물은 노리히코 단(Norihiko Dan and Associates)이 2013년 설계한 〈오모테산도 케야키 빌딩Keyaki Building〉이라는 작품으로, 평면이 주로 곡선으로 구성되며, 평면을 둘러싸는 일련의 콘크리트 기둥들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8 좁아지다가 다시 넓어지는 양상을 보인다(그림 8). 건축가에 따르면 외관 디자인은 횃불 모양에서 착안되었으며, 정면성을 두드러지지 않게 하는 대신 행인들이 길을 걸어감에 따라 계속적으로 달라지는 시선의 각도에 따라 다소 밋밋할 수 있는 건물의 외관이 다양한 방식으로 경험될 수 있도록 유도하였다. 지키 장의 관점으로 풀어서 서술해보면, 노리히코 단 그리고 토요 이토의 작품 모두 “정면성을 거부”한다는 맥락에서 수퍼플랫 어버니즘을 대표하는 사례이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적 장치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이토 및 단의 건물을 거리에서 마주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파사드’를 연상시키는 무엇과 마주하게 되는데, 이를 수퍼플랫 어버니즘 이론의 한계로 지적하는 것은 너무 나이브한 관점일까?(그림 건축과 미술 토요 이토 (Toyo Ito), 〈토드의 오모테산도 빌딩 TOD’s Omotesando Building〉 252 9 10 11 〈큐-프런트 Q-Front〉 9-10) 상업건물의 속성상 한정된 필지에 층수를 위로 올리는 방식을 (1999)의 전경, 그리고 취할 수밖에 없으며, 비싼 땅값 및 임대료 탓에 건물과 건물 사이의 Q’s Eye (스크린). 입면 상단부에 위치한 ©백승한 간격이 좁은 것은 여느 대도시의 상황에서나 비슷할 것인데, 이것은 12 쿠마 켄고 (Kuma 본 건물에도 적용된다. 또한, 장이 말하는 수퍼플랫 어버니즘의 특징에 Kengo), 〈JR 시부야 역 따르면, 이들 건물의 존재감은 어느 정도 덜 강조되는 측면이 있음에도 Shibuya Station Façade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특정 건축가의 정체성이 반영된 아이콘이 ©백승한 파사드 리노베이션 JR Renovation〉 (2003). 된다. 나아가 이토가 제시하는 나무 모양의 지그재그 선들이 중첩된 스케치적인 입면은 건물의 정면성이 덜 강조된 선들의 균등한 배치에 가깝지만, L자 모양이라는 대지의 형태에 따라 꺾이고 보이드/솔리드의 리듬 분배에 따라 결국 (어쩌면 당연하게도) 통속적인 파사드 및 외피 디자인을 생성한다. 필자가 보기에 수퍼플랫 담론 그리고 납작함 논의에서 아직까지 충분히 논의되지 않은 부분은, 행동하는 인간 주체, 일련의 비인간 행위소actant, 그리고 이러한 인간/비인간 행위/사건들의 네트워크가 만들어내는 세계의 이미지와 분위기에 대한 고려이며, 본 글의 나머지는 이를 시부야역의 상징적 건물인 큐-프런트에 대한 분석을 통해 접근하고자 한다. 큐-프런트는 1999년 준공되었으며, 교차로를 두고 쿠마 켄고가 11 수행한 리노베이션 프로젝트인 시부야 역사 파사드와 마주하고 있다(그림 11-12). “Q’s Eye”로 알려진 대형 스크린이 큐-프런트 입면 12 상단부에 위치해 있으며, 가로 10미터 및 세로 10미터이다. LED 스크린이 넘쳐나는 요즘 Q’s Eye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Q’s Eye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큐-프런트 스크린을 포함해 주변 건물들에 설치된 3-4개의 스크린들이 서로 연동되어, 평상시에는 각자의 영상을 독립적으로 사용하는 한편 어느 순간 동일한 영상을 동시적으로 내보낼 수 있다는 점이다(그림 13-16). 시부야역은 극도로 혼잡하고 어떠한 통일된 시지각적 경험을 좀처럼 허용하지 않는 종류의 장소이지만, 흥미롭게도 큐-프런트 및 일대 건물의 표면에 설치된 일련의 디지털 스크린에서 송출되는 동일 영상의 동시적 상영이 일시적으로나마 장소감을 부여하고, 해당 지역을 배회하는 행인들에게 의사소통의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하지만 이가라시는 이러한 큐-프런트적 건축과 미술 254 현상을 영화 〈블레이드 러너 1982〉에서 묘사하는 디스토피아적 도시 이미지가 현실이 된 사례라고 설명하는 데 그친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큐-프런트는 일종의 기 드보르가 말한, 모든 생생한 것이 이미지로 치환되어 더 이상 진정한 경험이나 삶의 방식이 가능하지 않은, 스펙터클 사회의 일본 버전에 지나지 않는다. 큐-프런트에 대한 이가라시의 해석이 이미지 사회에 대한 다소 고전적 접근이라면, 영화학자 마크 스타인버그Marc Steinberg는 Q’s Eye로 비롯한 이미지 사회의 다층성과 복잡성에 주목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큐-프런트의 외부 표면을 구성하는, ‘Q’s Eye라고 불리는 13 거대한 LED 스크린은 소비 주체를 흔히 영화나 티브이를 마주하는 구경꾼의 한 형태로 만드는가? … (중략) … 14 여기서 스크린은 단지 (산만한 주목의 방식을 가지고 있는 움직이지 않는 주체를 가정하며) 주목을 ‘포획’하려는 것이기보다는, (그들의 신체와 함께 유동적인 상태에 있는 움직이는 주체에게) 이미지를 투영한다.”23 스타인버그의 주장을 다시 풀어서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개인은 비록 이미지 과잉 사회에서 무력한 존재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한 사회에서 힘을 행사하는 주체들 역시 무수히 많으며, 따라서 위에서 아래로 혹은 아래에서 위로와 같은 일방적 힘의 도식은 다층적 힘의 관계망에 따라 펼쳐지는 불확정적 세계의 도시 스펙터클의 본질을 충분히 파악하기에 한계가 있다. 스타인버그는 또한 Q’s Eye를 비롯한 스펙터클의 작동 방식을 “집합assemblage”이라고 명명하면서, 미셀 푸코가 감옥 분석에서 제시한 일망감시체제the panoptic system의 메타포로 파악하는 것이 15 어렵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이러한 집합은 일망감시적이지 않다. (Q’s Eye에서의) 눈은 감시하지 않으며, 그 목적은 주체에 대한 23 Marc Steinberg, “Building Perceptions: Media Architecture and the Hypersurface Experience” (pp. 128-137), Parachute 113, 2004: pp 130, 131. 13~16 Q’s Eye와 연동되는 주변 건물의 스크린들. ©백승한 16 수퍼플랫 어버니즘을 넘어 | 백승한 257 적극적 주체이기도 하다. 정보를 얻는 것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그것의 목적은 지식- 스타인버그의 큐-프런트 분석은 소비문화 시대의 주체의 위상을 정보를 주체에게 투영하고, 신체를 기호의 ‘하얀 벽’으로 사용하며, 나아가 신체를 현대 상품문화를 정의하는 소비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접점이며, 필자는 이를 통해 수퍼플랫 어버니즘 기호 안으로 포획하는 것이다.” 논의의 확장 가능성을 살펴보았다. 장과 이가라시의 수퍼플랫 논의는 24 여전히 이를 위한 좋은 토대이지만, 필자는 그들이 제시하는 ‘플랫함’ 혹은 ‘납작함’의 개념이 다소 한정적으로 사용되는 측면에 주목하였다. 위 인용문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이러한 집합은 일망감시적이지 않다”라는 첫 문장이다. Q’s Eye를 비롯한 시부야역이 하나의 집합이라고 수퍼플랫 건축의 분류에 속하는 건축가들이 문자 그대로 한다면, 그것을 구성하는 체계는 지금까지 살펴본 수퍼플랫 논의에서 초-납작한 건물의 이미지를 생성하려 시도하는 경향이 있음에도 지적된 것처럼 어떠한 미리 고안된 위계를 상정하기 어렵다. 집합의 불구하고, 전술하였듯 (비록 장소-특정적이며 구축적인 속성을 지니는 구성요소 역시 미리 정해지지 않는다. 시부야역이라는 집합을 구성하는 건축의 본질 때문일 수 있음에도) 이들의 건축은 여전히 주변 건물과 것은 셀 수 없이 많은 종류들을 포함하며, 이는 무수히 많은 건물과 구분되어 특이성이 부각되는 제단의 기념비로 다가온다. 큐-프런트 디지털 스크린, 행인들, 달리는 자동차와 경적소리, 아스팔트의 열기, 건물의 멀티스크린 Q’s Eye가 시부야역의 도시경관을 형성하는 주변의 공사 소음, 그리고 시부야역 일대의 형성에 참여한 직/간접적 주요 요소로서 좀 더 흥미로운 사례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스크린을 권력 주체 전부를 포함한다. 둘러싼 건조 환경 요소들이 (비록 한정적으로나마) 공유된 지평 속에 재배치되어 새로운 종류의 관계 맺기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이다. 필자는 스타인버그가 일망감시체제를 언급한 이면에 스펙터클 한편으로 Q’s Eye는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그리고 각종 논의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한 그의 비판적 고찰이 함축되어 있다고 본다. Q’s Eye와 같은 초대형 스크린이 만약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품광고를 끊임없이 송출하는 플랫폼으로서 마주하는 이를 압도하며, 상업자본의 상징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경험하는 무수히 많은 이들은 그 때로는 (개인의 역량만으로는 어떠한 것도 바꿀 수 없다는) 무력감을 스크린을 일상적으로 작동 가능하게 하는 소비문화 시스템에서 자유롭지 느끼게 한다. 전통적 의미의 소통과 연대는, 철저하게 자본주의에 의해 못한 채 소외감을 느끼며 상품물신의 끝없는 굴레 속에서 자유롭지 못한 작동하는 Q’s Eye를 둘러싼 시부야역 일대에서 거의 불가능해 보이며, 수동적 주체인가? 그의 문맥을 따르면, 대답은 당연히 ‘아니오’다. Q’s 주변을 배회하거나 스쳐 지나가는 개인은 소비체제의 수동적 소비주체로 Eye에서 상영되는 영상은 일방향적으로 전달되지만, 이는 수용자에 의해 포획되는 듯하다. 하지만 스타인버그는 Q’s Eye 분석을 통해 오히려 받아들여질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스크린’이 아니라 ‘눈’이라는 용어를 반대 논리를 제시한다. Q’s Eye는 시각적으로 압도하는 특징에도 사용한다는 측면에 주목하는 스타인버그에 따르면, Q’s Eye는 시부야역 불구하고 무수히 많은 힘들 중 하나일 뿐이다. 스타인버그의 말처럼 Q’s 일대를 작동시키는 무수히 많은 (권력이 아닌) 힘들 중 하나일 뿐이며, 그 ‘Eye(눈)’는 무수히 많은 눈(개인)들 중 하나일 뿐이며, 그들 사이의 이면에는 어떠한 리바이어던적인 (즉 전지전능한) 권력 관계가 은밀하게 위계나 힘의 네트워크 구성에서 선후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매우 어려울 자리 잡고 있지 않다. Q’s Eye가 광고라는 수단을 통해 잠재적 소비자인 뿐 아니라 무의미하다. 문자 그대로 평평해진 또는 납작해진 세계를 행인/구경꾼을 일시적으로 즐겁게 하면서 “신체를 현대 상품문화를 마주하는 개인은, 선행하는 전통이나 규칙에 과다하게 의존하지 않은 채, 정의하는 소비의 기호 안으로 포획”하기를 시도하지만, 이와 마주하는 렘 콜하스가 그의 에세이 “보편적 도시The Generic City, 1995”에서 납작한 각 개인은 그 힘의 전달을 무력화할 수 있는, 즉 ‘플랫하게’ 만들 수 있는 글쓰기를 통해 자신이 세계 도시와 맺는 관계를 자신의 방식으로 보여준 24 것처럼, 자신의 신념이나 전략에 따라 영도零度에서 출발하는 세계의 Steinberg, 위의 글, 131-132. 건축과 미술 258 수퍼플랫 어버니즘을 넘어 | 백승한 259 의미를 탐구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플랫함은 일종의 미학이자 윤리이고 존재론적 성찰의 계기가 되며, 또한 하나의 시각문화 혹은 건축 현상으로서, 주어진 것the given을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변화하는 사회와 관계하며 좀 더 유연한 방식으로 관계할 수 있는 태도일 수 있다. 지금 여기의 사회가 제어가 불가능한 괴물처럼 보일지라도 수퍼-플랫한 삶의 태도를 견지한다는 것은, 내가 관여하는 사회에 대한 성급한 진단에 과다하게 의존하지 않은 채, 이미 고안된 일련의 위계나 의미 체계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자신의 작동 방식과 리듬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재배치시키는 일련의 미시적 전술의 의의가 있다. 한정적으로 이해하고 실천되는 수퍼플랫 개념은, 분화 가능한dividual 나와 내가 마주하는 도시 현실 사이의 규정될 수 없는 관계의 모호함과 무한성에 주목할 때, 당대 어버니즘의 맥락 안에서 긍정적으로 재再활성화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건축과 미술 2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