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의사학 제23권 제2호(통권 제48호) 2020년 12월
Yonsei J Med Hist 23: 7-39 December 2020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인문사회의학교실 의사학과/ 의학사연구소
http://dx.doi.org/10.35276/yjmh.2020.23.2.7
일반논문
동아시아 병원의 기원*
1)이현숙**
Ⅰ. 머리말
Ⅱ. 고대 사찰 내 병원
Ⅲ. 당송대 비전양병원과 동아시아 빈민의료기관
Ⅵ. 병원과 의원
Ⅳ. 맺음말
Ⅰ. 머리말
뺷설문해자뺸에 따르면, ‘병(病)’이란 ‘질(疾)’보다 위중한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였다.1) 또
한 ‘원(院)’이란 사찰이나 관아의 큰 건물을 의미하는데, 병원은 병자를 보살피는 공간이라
는 뜻이다. 위중한 병자를 보살피는 건물을 의미하는 ‘병원’이라는 용어는 불교 사찰 공간
가운데 치료를 행하는 건물을 병원이라고 불렀던 것에서 유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병원이란 “환자를 진찰하고 치료하기 위하여 설치한 장소”로서 입원
환자 2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춘 기관을 병원이라 하고, 이에 미치지 못하는
* 이 논문은 2015년 정부(교육기술과학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이다
(2015S1A5A2A03048654).
** 한국생태환경사연구소 소장, 전근대 동아시아의학사 전공
1) 說文解字“病, 疾加也.”, 漢典, http://www.zdic.net. 검색일: 2020.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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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을 의원(醫院)이라 하여 법률에 따라 구분하고 있다.2) 빈곤자를 수용하고 의지할 곳
없는 유랑인들을 보호하며 나병환자들을 치료 수용해온 과거를 되돌아보면 숙식하는 병자
를 돌보는 공간의 존재는 수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의
사와 간호사가 상주하면서 환자를 치료하는 근대적인 모습의 병원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현재 중국에서는 우리의 병원에 해당하는 상급의료기관을 의원이라고 하고 있다.3)
1948년 7월 30일에 공포되어 2004년에 개정된 일본의료법에 경우, 병원(病院: びょうい
ん)이란이란 환자를 수용하여 의사 또는 치과 의사가 진찰, 치료하는 시설을 의미한다. 또
한 일본 의료법에 의하면, 입원용 침대 수가 20개 이상 되는 것을 병원이라고 부르고, 19
개 이하인 것은 진료소라고 명명하였다.4) 현대 한국에서 사용되는 병원이라는 개념이 일
본의 것과 같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들이 알고 있는 병원은 그 기능면에서 볼 때 20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나타난
의료 기관으로서, 유럽의 ‘hospital’ 또는 ‘infirmary’를 번역한 용어였다.5) 그런데 기존
의 병원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근대에 집중되어 있으며,6) 사찰 내에 병원 공간이 있었다는
점은 간과하고 있다. 즉 동아시아 전근대 사회에서 최초로 병원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은
불교 사찰이었으며, 실제 ‘병원’이라는 공간이 존재하였다. 따라서 본고는 승려의 질병 치
료를 위하여 설치되었던 ‘병원’이라는 공간이 어떻게 공공 의료기관으로 변화해 나갔는지
그 변천과정을 살펴봄으로써, 고대 동아시아 사회에서 ‘병원’이라는 용어가 가지는 함의와
그 기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본 연구를 통해 16세기 이후 서양의 의료기관 체제가 동
아시아에 소개되면서 주로 ‘병원’이라고 번역되었던 이유를 보다 자세하게 규명할 수 있을
2) 뺷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뺸, 병원 항목, https://encykorea.aks.ac.kr. 검색일: 2020.10.20.
3) 1921년에 설립되었던 북경협화의원 그리고 중국 베이징대학의 부속병원은 “북경대학 인민의원(人民醫
院)”이라고 하여 한국 및 일본과는 달리 ‘의원’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4) 일본 의료법을 영문 번역과 함께 소개하는 일본 법무성의 웹사이트에 따르면, 의료기관에 대한 설명
중 병원(Hospitals), 진료소(診療所, Clinics), 조산소(助産所, Birthing Centers)라고 표기하여 의원이
라는 용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다. 즉 제1장 총칙 제3조에 따르면, “질병의 치료(조산을 포함)를
하는 곳으로서 병원 또는 진료소가 아닌 곳은 이에 병원, 병원분원, 산원, 요양소, 진료소, 진료소, 의
원, 기타 병원 또는 진료소에 혼동하기 쉬운 명칭을 붙여서는 안 된다.”라고 하여, 의료법 중 의원이
라는 용어를 유일하게 사용하고 있다.
5) 김영수, 「근대 일본의 ‘병원’: 용어의 도입과 개념형성을 중심으로」, 뺷의사학뺸 26-1, 2017, 29-55.
6) 대표적인 연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김영수, 「근대 일본의 ‘병원’: 용어의 도입과 개념형성을 중
심으로」, 뺷의사학뺸 26-1, 2017; 신규환, 서홍관, 「한국 근대 사립병원의 발전과정: 1885년-1960년
대까지」, 뺷의사학뺸 11-1, 2002; 신규환, 「한중 선교병원의 “정체성” 논쟁 비교연구: 제중원과 시의원
의 사례를 중심으로」, 뺷동방학지뺸 172, 2015; 신규환, 「근대 병원건축의 공간변화와 성격」, 뺷역사와
경계뺸 97,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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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더하여 최상급 치료기관을 ‘의원’이라고 하는 중국과 달리 한국과 일본에서 ‘병원’
이라고 부르는 원인을 보다 자세하게 규명할 수 있을 것이다.
Ⅱ. 고대 사찰 내 병원
1. 사찰 내 병원 공간
중국 당나라 서명사(西明寺)의 승려였던 도선(道宣, 596-667)은 667년 장안의 정업사
에 승려에게 계율을 내리는 의식을 행하는 계단(戒壇)을 설립하면서 「관중에 계단을 창립
한 도경」이라는 글을 남겼다(이하 뺷계단도경뺸으로 약칭).7) 그는 계단을 설명하기 위해 인
도의 약지수원이라는 대형 사찰 내에 존재하는 건물들을 그림으로 남겼는데, 여기에서 사
찰 내 병자를 치료하는 병원의 존재를 찾아볼 수 있다.
A-① 현장법사(玄奘法師)의 뺷서역전뺸에서 … 지금 약지수원에는 모두 64개의 원이
있는데, 사방으로 통하는 큰길이 있으며 남쪽으로 26개의 원이 있다.8)
A-② 중원의 북쪽에 6개의 원이 있는데, 첫째 사위타원, 둘째 천하부동문원, 셋째 천
하음양서원, 넷째 천하의방원, 다섯째 승정인원, 여섯째 천하동자원이다. 중원의 서
쪽에 6개의 원이 있는데, 첫째는 무상원, 둘째는 성인(聖人)병원, 셋째는 불시(佛示)
병원, 넷째는 사천왕헌불식원, 다섯째는 욕실원, 여섯째는 유측원이다.9)
위 자료 A는 인도를 다녀온 현장(602-664)의 뺷서역전뺸을 인용하여, 불교사찰 내에 어
떠한 공간들이 존재하였는지 소개하고 있다. 도선은 중국 남산율종의 개창자로서 중국불
7) 뺷관중창립계단도경뺸에서 관중(關中)은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을 의미한다.
8) 釋道宣 撰, 뺷關中創立戒壇圖經뺸 제1권, “玄奘法師뺷西域傳뺸中 … 今約祇樹園中, 總有六十四院, 通衢大巷,
南有二十六院.”[신수대장경 T45n1892_001] 이하 본고에서 이용한 신수대장경은 모두 CBETA 漢文大
藏經(http://tripitaka.cbeta.org)에서 인용하였다.
9) 뺷關中創立戒壇圖經뺸 제1권, “中院東門之左七院(初・律師院, 二・戒壇院, 三・諸論師院, 四・修多羅院, 五・佛
經行院, 六・佛洗衣院, 七・佛衣服院); 中院北有六院(初・四韋陀院, 二・天下不同文院, 三・天下陰陽書院, 四・
天下醫方院, 五・僧淨人院, 六・天下童子院); 中院西有六院(初・無常院, 二・聖人病院, 三・佛示病院, 四・四天
王獻佛食院, 五・浴室院, 六・流廁院)”[신수대장경 T45n1892_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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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에서 계율과 계단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사찰에 계단을 건립하는 모범을 찾
고자 뺷계단도경뺸을 쓰고 그림으로 전하였는데, 이는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사찰의 모
습이었다고 한다.10)
위 자료 A에 따르면, 인도 약지수원의 경우 모두 64개의 건물로 구성되었으며, 남쪽에
26개의 건물이 배치된 대형 사찰로서, 사찰내부에 사방으로 통하는 대로가 있었다. 본고
에서 주목하는 것은 의료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중앙의 북쪽과 서쪽에 각각 6개씩 배치
된 공간이다.
그림 1. 17세기에 복원된 도선의 뺷계단도경뺸 내 사찰전도
출처: 북경대학 考古文博學院, http://www.wenbozaixian.com. 검색일: 2020.10.20.
북쪽의 건물은 주로 각종 서적들을 보관하거나 사찰 내에서 노역을 하는 이들의 공간이
었던 것으로 보인다. 도선이 남긴 또 다른 글 뺷중인도 사위국 기원사 도경뺸에는 중인도의
기원정사 사례를 소개하면서 해당 건물에 대한 보다 상세한 설명이 곁들여져 있다. 이에
따르면, 고대 인도의 바라문교의 사부경전을 의미하는 사위타(四韋陀)를 보관하는 첫 번째
건물과11) 다양한 글을 보관하는 두 번째 건물,12) 그리고 각종 주문과 진언을 포함한 음양
10) 那航硕, 「뺷戒壇圖經뺸與佛寺建筑中國化」, 뺷中國宗教뺸 2018年12期, 2018. 이에 따르면, 불탑 중심의
고대 인도의 사찰 건축이 중국에 전파되면서 불당 위주의 건축물로 중국화 되었다고 한다.
11) 釋道宣 撰, 뺷中天竺舍衛國祇洹寺圖經뺸, “東頭第一名, 曰違陀院. 外道同宗以為極教, 佛許比丘一時讀之,
為伏外道故中有周閣, 四天下中韋陀之文普集其中, 院有七寶小鼓子.”[신수대장경 T45n1899_002] 기원
사의 경우, 약지수원과 건물 위치가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건물 명칭이 거의 같아서 도선이 뺷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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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을 보관하는 세 번째 건물,13) 각종 의방을 보관하는 네 번째 건물,14) 18세 이상 20세
이하로 아직 구족계를 받지 못한 정인(淨人)이 거주하는 다섯 번째 건물,15) 그리고 제천동
자 3백인을 모신 여섯 번째 건물이 있었다.16)
서쪽에는 무상원과 성인과 불시 두 종류의 병원, 그리고 식당으로 보이는 사천왕헌불식
원과 욕실 및 화장실 총 6개의 단독 건물이 있었다. 무상원은 율종 승려들이 중병에 걸려
죽음을 기다리는 공간이었다.17) 선종(禪宗)에서는 열반당 또는 연수당이라고 불리웠는
데,18) 종파에 따라 당호의 명칭이 변경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병자를 수용하는 병원 가운
데 성인 병원은 부처의 10대 제자 중의 한 명인 사리불 등이 투병한 곳으로 의약이 항상 준
비되어 있는 공간이라고 하였다.19) 도선은 불시 병원을 기원사에서는 불병방이라고 하였
는데, 부처의 주치의이자 제자인 기파 그리고 제자 아난이 부처님을 우러러 모시고 있으며
대범천왕이 16종의 악기로 팔부악을 부는 모습을 모두 금은칠보로 만들어 놓아 부처가 중
생의 질병을 위하는 공간이라고 하였다.20)
고대 인도 사찰 내 치료를 위한 공간을 언급한 불경을 번역하면서 당대 의정(義淨,
635-713)은 병방이라고 번역하였다.
B-① 내가 이제 수거하는 법식에 대하여 설명하겠다. 만약에 남은 비계약을 필요로
하는 비구나 다른 비구가 와서 찾는 경우에는 곧바로 주도록 하며, 만약에 와서 찾는
도경뺸에서 설명하는 건물들의 기능과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12) 뺷中天竺舍衛國祇洹寺圖經뺸, “次西第二院, 名為書院. 大千界中不同文書竝集其中, 有大重閣安置書籍.”
13) 뺷中天竺舍衛國祇洹寺圖經뺸, “次西第三院, 名陰陽書籍院. 百億天下陰陽群籍總集此坊, 佛開比丘一時有閱為
惟異術.”
14) 뺷中天竺舍衛國祇洹寺圖經뺸, “次西第四, 醫方之院. 諸天下中所有醫方皆集. 坊中有銅鈴, 狀如麥角可受三斗,
以金師子為鼻. 比丘入院鈴鳴門開不勞寺人, 音如琴音聲. 比丘聞之自然開解諸業通塞, 三果已上有病, 來入此
院聞鈴便愈.” 의방원에는 의서뿐만이 아니라 청동방울을 두어 三果 이상의 병으로 입원한 아픈 승려
가 그 소리를 듣고 치유된다고 한다.
15) 뺷中天竺舍衛國祇洹寺圖經뺸, “次西第五院, 名僧家淨人坊. 十八以上二十已下, 諸子等常止此中, 掃洒諸院清
潔無勝.” 정인들은 주로 사찰의 청결을 담당하였기에, 사찰 내 노역에 종사하는 자들이 머무는 공간
이라고 할 수 있다.
16) 뺷中天竺舍衛國祇洹寺圖經뺸, “次西第六, 名天童院. 諸天童子常有三百為供, 佛故止此院中.”
17) 뺷中天竺舍衛國祇洹寺圖經뺸, “西塞名無常院. 中有一堂但以白銀. 四面白廊白華充滿. 畫白骨狀無處不有. 諸
欲無常皆舉至此. 令見白骨諸非常相. 既命終已.”
18) 이현숙, 「고려 불교의학의 한 단면: 승려의 질병과 치료」, 뺷한국중세사연구뺸 48, 2017.
19) 뺷中天竺舍衛國祇洹寺圖經뺸, “次小巷北第二院, 名聖人病坊院. 開門如上, 舍利弗等諸大聖人有病投中, 房堂
眾具須皆備, 有醫方藥庫常以供給, 但擬凡聖非所止.”
20) 뺷中天竺舍衛國祇洹寺圖經뺸, “次北第三院, 名佛病坊, 開門如上, 堂宇周列花樹兩列. 耆婆・阿難在此瞻侍, 大
梵天王施八部樂, 一一樂器有十六種, 皆以金銀七寶所成, 佛為眾生示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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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 없는 경우에는 마땅히 병방(病坊)에 보내어 병방에서 잘 보관하게 하라. 만약에
달리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거든 그곳에 가서 취하여 복용하게 할 것이니, 가르침에
따르지 않는 자는 월법죄(越法罪)를 지게 된다.21)
B-② 스승이 대답했다. “나는 병방에 있다. 병자들은 다 이 방에 모여 있다.22)
위 자료 B-①은 의정이 번역한 뺷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약사뺸 중 일부로서, 부처가 약을
수거하는 법식을 설명한 것이다. 지급된 약을 사용한 비구는 약이 남은 경우 병방에 보내
어 차후에 다른 비구가 다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라고 규칙을 만든 것이다. 자료 B-②의
뺷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출가사뺸 역시 당나라 의정이 번역한 경전으로, 인도 비구의 스승
이 병자들이 모여 있는 병방에 있다고 하였다. 즉 병방은 인도 사찰 내에서 아픈 자들이 치
료를 받는 곳이며, 약을 보관하는 공간이었다.
앞선 세대인 도선(596-667)은 병원 또는 병방원이라고 번역하였는데, 의정은 병방이라
고 하였다. 병원과 병방은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도선이 사찰도
에서 병원이라고 번역하였던 것은 ‘원’이라는 건물에 좀더 주안점을 둔 것으로 파악된다.
그런데 현재 남아있는 뺷계단도경뺸의 판본은 17세기에 판각된 것으로 도선의 기록과 차
이가 있다. 송대 이후의 사원 모습을 많이 반영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23) 도선이 설명한
바에 따라 사찰전도를 그리면 <그림 2>와 <그림 3>과 같다.24)
21) (唐)義淨 譯, 뺷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약사뺸 1권, “我今當說收擧法式. 若苾芻所用殘脂, 若餘苾芻來, 從
求索者, 應卽相與. 若無人求者, 當送病坊, 病坊好爲藏貯. 若有須者, 於彼處取, 守持而服. 不依教者, 得
越法罪.” (K1389 v37, p.601c01) 이하 고려대장경의 원문과 번역은 불교기록문화유산아카이브
(https://kabc.dongguk.edu)의 것을 이용하였다. 본고에서 이루어진 번역은 필자가 문맥이 맞도
록 간혹 수정을 한 것이다.
22) (唐)義淨 譯, 뺷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출가사뺸 3권, “師卽告曰: 我之住處乃是病坊, 諸有病者, 皆投來此.”
(K1391 v37, p.916b01).
23) 소현숙, 「隋의 國家大寺 大興善寺」, 뺷중국사연구뺸 88, 2014.
24) 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河北省文物硏究所 鄴城考古工作隊, 河北臨漳縣鄴北城遺址東魏北齊佛寺塔基遺
跡的發現與發掘(뺷考古뺸 2003-10); 소현숙, 「隋의 國家大寺 大興善寺」, 61-62에서 재인용.
12 ┃ 연세의사학 제23권 제2호
그림 2. 뺷중천축 사위국 기원사 도경뺸에 기초한
사찰 평면도
그림 3. 도선의 뺷계단도경뺸에 기초한 사찰전도
그림 2 뺷기원사 도경뺸은 그림 3 뺷계단도경뺸과 달리 대불전을 감싸는 구조로 요불방(繞
佛坊)이 있다. 그러나 병원 공간은 두 그림 모두 사찰의 서쪽에 식당과 욕실 및 화장실과
함께 배치되어있다. 도선은 인도 기원사에 대해 설명할 때, 불시병원을 불병방, 그리고 성
인병원을 성인병방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당나라 초기에 인도의 불경을 번역하면서 치료
공간을 의미하는 병원과 병방은 같이 사용되었으며, 때로는 병방원이라 하여 함께 사용되
기도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병원이라는 치료공간을 포함한 사찰구조는 실제 중국 사찰 건축 내에 포함되었
던 것으로 보인다. 송대 조훈(曹勛: 1098-1174)은 1143년 선림사(仙林寺)를 창건하였는
데, 당시 설치한 건물 가운데 ‘병원(病院)’ 공간도 설치하였음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C. (선림사는) 임안 동남쪽에 있는데 예전부터 제일의 도시로 불리웠다. … 소흥 13
년(1143) 절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3개의 문・불전・약사전・법당・불각계단・침실・방
장 승당・부엌과 창고・낭무(廊廡)25)・종루・방앗간・병원・선승(選僧)・욕간과 측간 등
하나라도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 소흥 30년(1160)에 낙성하였다.26)
동아시아 병원의 기원 ┃ 13
위 자료 C에 따르면 선림사는 완공까지 총 17년이 걸렸는데, 조훈은 이를 축하하는 글에
서 ‘하나라도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라고 할 정도로 사찰에 필요한 모든 공간을 건축
하였다. 조훈의 글에 따르면 사찰을 건축할 때 통상 만드는 공간은 매우 다양하였는데, 크
게 승려들의 공간과 신도들의 공간, 그리고 두 부류가 공유하는 공간으로 나눌 수 있다. 삼
문, 불전, 약사전, 법당, 불각27) 등은 승려와 신도가 공유하는 공간이지만, 승려가 구족계
를 받는 계단(戒壇), 침실, 방장 스님이 사용하는 개인 공간과 일반 승려가 사용하는 승당
(僧堂), 그리고 부엌[厨庫]과 방앗간[磨坊]까지 이 모든 공간을 이어주는 회랑, 시간을 알
리기 위해 승려들이 북을 치는 종루(鐘樓) 그리고 병원(病院)과 승려들의 은밀한 공간이라
고 할 수 있는 목욕하는 공간과 측간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선승(選僧)은 정인(淨人)이 거주
하던 공간과 같은 성격으로서, 아직 구족계를 받지 않은 수련승들이 머무는 곳으로 이들은
병원에 머무르는 승려들을 보살폈던 것으로 보인다. 즉 12세기 송대 사찰에서도 병자를 위
한 병원이라는 공간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요컨대 667년 도선은 중국 사찰이 모델로 삼아야 하는 이상적인 인도의 사찰 구조를 소
개하였는데, 병자를 치료하는 병원도 포함되었다. 병원은 사찰의 서쪽에 식당과 욕실 그리
고 화장실 등 승려들의 생활공간 속에 있었다. 이는 후대 사찰 건축의 모범이 되어서 송대
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져갔으며, 병원 공간 역시 사찰 건축에서 중요하였던 것을 알 수 있
었다.
2. 계율 속의 치료 공간
사찰 내에서 병자를 치료하는 병원은 불교 경전 속에서 그 구체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 있
다. 불교 사찰은 수많은 승려와 신도들이 함께 하는 공간으로서 때로는 수백 명 또는 수천
명이 모이는 곳이다. 또한 승려의 경우 집단생활을 하기 때문에 청결과 위생에 각별히 주
의가 필요하였다. 질병을 방지하기 위해 양치나 세수 목욕에 대한 계율이 일찍부터 발달하
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병에 걸리면 담당한 업무를 잠시 멈추고 병원 공간에 머무르면
서 약을 복용하고 치료를 받았다. 특히 사분율에 있는 질병 치료 관련 계율을 통해 고대 사
25) 正殿 아래로 東西에 붙여 지은 건물을 뜻한다.
26) (宋)曹勛 撰, 뺷松隠集뺸 권31, 仙林寺記, “臨安在東南, 自昔號一都㑹. … 自紹興十有三年創為三門・佛殿・藥師
殿・法堂・佛閣戒壇・寝室・方丈僧堂・厨庫・廊廡・鐘樓・磨坊・病院・選僧・浴厠, 無一不備 … 至紹興三十年落成.”
27) 佛堂 즉 부처를 모신 大廳을 뜻한다.
14 ┃ 연세의사학 제23권 제2호
찰 내의 병원 생활의 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다.
사분율은 비구가 지키는 250계와 비구니가 지키는 348계가 기록된 승려의 근본계율로
서, 사찰생활의 준거틀을 제공하였다.28) 조위(曹魏: 220-265)대에 안식국 출신 승려 담
제(曇諦)가 사분율에서 추출하여 번역하였던 뺷갈마(羯磨)뺸에 따르면, 사찰 내에서 승려가
병이 나서 약을 복용하게 되면 다음과 같은 절차를 밟도록 하였다.
D-① 7일약을 받는 글: 먼저 정인(淨人)의 곁에서 약을 받고 나서 그것을 가지고 대
비구(大比丘)의 처소에 가서 이렇게 말한다. “장로 스님께서는 일심으로 생각하여 주
십시오. 저 비구 아무개는 병이 있는 까닭에 이 7일 약을 곁에 두고서 7일 동안 복용
하려고 이제 장로의 곁에서 약을 받겠습니다.” 이와 같이 세 번 말한다.29)
D-② 진형수약을 받는 글: 먼저 정인의 곁에서 약을 받고 나서 그것을 가지고 대비
구의 처소에 가서 이렇게 말한다. “장로 스님께서는 일심으로 생각하여 주십시오. 저
비구 아무개는 병이 있는 까닭에 평생토록 곁에 두고서 복용하는 이 약을 장기간 복
용하고자 이제 장로의 곁에서 약을 받겠습니다.” 이와 같이 세 번 말한다.30)
D-①에서 복용하는 7일약이란 뺷마하승기율뺸에 의하면 유제품, 유밀, 석밀, 지방 등과
같은 조미료 류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7일간의 저장을 견딜 수 있는 보존식이다.31) 평소 채
소류 위주의 식생활을 하는 승려가 병이 나면 꿀 그리고 유제품이나 지방과 같은 고단백 및
고지방식을 7일 동안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식이요법은 병방 또는 병원이라고 불리우는 공
간에 병자가 머무르면서 이루어졌다.
병원에 입소하기까지 일정한 의식이 있었는데, 정인이 제공하는 약을 받아서 장로에게
위와 같은 말을 3번이나 반복해서 한 다음에 입원할 수 있었다. 그런데 병자의 수발을 드는
28) 현전하는 신라 승려의 주석서 명칭을 분석해 본 결과 뺷梵網經뺸과 뺷四分律뺸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라는
점에서 한국고대불교 사찰에서 뺷사분율뺸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최원식, 「신라의 보살계 수용과
그 유포」, 뺷국사관논총뺸 29, 1991; 이현숙, 「치유 공간으로서의 한국고대 사찰」, 뺷신라사학보뺸 46,
2019, 191-192.
29) 뺷羯磨뺸 제1권, “受七日藥文: 先從淨人邊受已, 持至大比丘所作如是言; ‘長老一心念, 我比丘某甲, 有病因緣,
是七日藥爲共宿七日服, 故今於長老邊受.’ 如是三說.”[고려대장경 K0915; 신수대장경 T22n1433_001].
30) 뺷羯磨뺸 제1권, “受盡形壽藥文: 先從淨人邊, 受持至大比丘所作如是言; ‘長老一心念, 我比丘某甲, 有病因
緣, 此盡形壽藥, 爲共宿長服, 故今於長老邊受.’ 如是三說.”
31) 服部敏郞 저, 이경훈 역, 뺷불교의학뺸(경서원, 1986), 202.
동아시아 병원의 기원 ┃ 15
사람은 병원 바로 옆에 거주공간이 있는 정인이었다. 즉 정인은 사찰 경내를 깨끗하게 하
는 청소할 뿐 아니라 병원 옆에 거주하면서 병자들의 시중을 들었던 것이다.
D-②의 진형수약이란 하리륵이나 하마륵, 생강이나 후추 종류로서 종신토록 복용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32) 7일약을 복용하여도 낫지 않을 경우 진형수약을 복용하였던 것으
로 보인다. 당대에 오면 이보다 훨씬 다양한 약을 이용하였을 것이다.
선종 사찰의 경우, 율종과 달리 뺷사분율뺸보다는 백장 회해(懷海, 720-814)선사에서 유
래한 뺷선원청규뺸에 따라 다음과 같은 절차에 따라 치료가 이루어졌다.
E-① 예불 참여를 쉬려고 함: 주지인이 약을 먹는데 일상적인 병환이 아니어서 3일
을 넘기게 되면 마땅히 별채에서 휴식을 취하되 시자(侍者)로 하여금 수좌와 지사에
게 아뢰게 한다. 만일 창고를 맡은 이나 두수(頭首)에게 병이 있으면 모두 공두(供頭)
행자를 시켜 유나에게 아뢰게 하고 휴가를 청하여 연수당(延壽堂)【어떤 곳에서는 성
행당(省行堂)이라고 한다】으로 내려가 휴식을 취하도록 한다. 【병환이 경미하여 업
무를 할 수 있으면 본채에서 휴식을 취한다】 병이 지속되면 곧 주지인에게 아뢰어 따
로 (업무) 교대를 청한다. … 무리 중의 형제가 병이 있는 것을 깨달으면 스스로 가거
나 혹은 사람을 보내어 당사(堂司)에게 보고하고 휴가를 청하여 쉬도록 한다. 그리고
요주(寮主)에게 보고한 이후 연수당에 들어간다.33)
E-② 병이 든 승려가 있으면 그 지방 사람으로 오래도록 함께 수행한 벗은 병자의 평
상 앞에 마주하여 향촉과 불상을 배열하고 염송하며 찬불하기를, “물 맑으면 가을 달
비추듯, 간곡히 기도하면 복전(福田)을 낳습니다. 오로지 불보리(佛菩提)만이 있으니
이곳이 참 귀의처입니다. 오늘 아침 병이 있는 비구 모(謀)를 위하여 다생(多生)의 원
수를 풀게 하고 누겁의 허물을 참회하나이다. 특히 우러러 청중에 몸 던져 성스러운
이름을 칭송하여 깊은 재앙을 물리치고자 하나이다. 우러러 존중의 힘 빌어 기도 하
나이다”하며 청정법신이신 비로자나불을 열 번 부른다. …34)
32) 服部敏郞, 뺷불교의학뺸, 202.
33) 자각 종색선사 원저, 최법혜 역주, 뺷고려판 선원청규 역주뺸(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1), 269.
34) 뺷고려판 선원청규 역주뺸, 269.
16 ┃ 연세의사학 제23권 제2호
위 자료 E는 송나라의 자각 종색(慈覺宗賾, 1009?-1092?) 선사가 찬술한 뺷선원청규뺸
로서, 1254년(고려 고종 41)에 경남 남해에 있던 분사대장도감에서 조판한 것이다. 오랫
동안 선종 사찰에서 시행되던 규칙이 백장 회해(百丈懷海, 720-814) 선사에 의해 정리되
었던 것으로, 이후 수차례의 개정이 이루어졌다.
위 자료 E는 뺷사분율뺸을 주축으로 한 자료 D의 뺷갈마뺸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즉 교종에서는 약을 분배하고 병자를 보살피는 역할을 하였던 정인이 위 자료 E에서는 밥
과 차, 과일 등을 담당하는 공두 행자가 담당하고 있으며, 병원이라는 명칭이 선종 사찰에
서는 연수당 또는 성행당으로 바뀌었다.35)
E-①은 질병에 걸렸을 때 치료를 받기 위해 연수당에 입실하는 절차가 신분에 따라 어떻
게 이루어지는지 잘 설명하고 있다. 사찰의 책임자 주지의 경우는 단독의 별채에서 정양과
치료가 이루어졌지만, 두수나 일반승려의 경우는 유나 또는 당사와 요주에게 보고한 뒤 연
수당에 들어가도록 하였다. E-②는 병든 승려를 문병할 때 함께 외우는 기도문으로서, 기
도 이후에는 비로자나불을 열 번 부르도록 하였다.
위 자료 E를 통해 선종 사찰 내에서도 승려들의 질병 치료가 사찰 내 특정한 공간에서 이
루어졌다는 것을 확인해 볼 수 있었다. 즉 선종 사찰 내에 있던 연수당이나 성행당은 기존
의 병원에 해당하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3. 간병계와 비전
병자를 간병하는 것은 승려뿐 아니라 불교 신도들에게도 중요하였다. 뺷범망경뺸에서는
다음과 같이 8가지 복전 가운데 병을 간호하는 간병 복전이 제1의 복전이라고 하였다.36)
F. 불자들아, 너희는 모든 병든 사람을 보면 마땅히 부처님과 다름없이 공양해야 하
니, 여덟 가지 복전(福田) 가운데 첫째가 병 든 사람을 간호하는 복전이니라. 부모와
스승과 스님과 제자가 병들어 팔・다리와 6근(根)이 온전치 못하고 여러 가지 병으로
고생한다면 모두 공양하여 잘 낫게 해야 하는데, 보살이 나쁜 마음으로 눈을 부라리
35) 이현숙, 「고려 불교의학의 한 단면: 승려의 질병과 치료」, 뺷한국중세사연구뺸 48, 2017, 282.
36) 8가지 복전은 1. 광야에 길을 만들고 우물을 파는 일, 2. 수로나 교량을 만들고 우물을 파는 일, 3.
험한 길을 고루 만드는 일, 4. 부모를 효심으로 봉양하는 일, 5. 스님을 공양하는 일, 6. 병자를 공양
하는 일, 7. 남의 괴로움이나 재앙을 구제하는 일, 8. 무차대회를 설하는 일 등이다. 服部敏郞, 뺷불교
의학뺸, 231.
동아시아 병원의 기원 ┃ 17
고 승방(僧房)에 가지 않으며, 성읍(城邑)・들판・산・숲・도로에서 병든 사람을 보고도
구원하지 않으면, 가벼운 죄를 범하는 것이니라.37)
위 자료 F에서 불자들은 부처님을 공양하듯이 병자를 보살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즉 뺷범망경뺸에서는 승방에서 아픈 스님이 있으면 공양하여 잘 낫게 해야 하며, 길가다가도
병든 사람을 보면 구원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불경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다.
승려뿐 아니라 불자라면 가난하고 병든 자를 도와야 한다고 강조하였던 부처의 가르침
은 4세기 인도에서 충실하게 지켜지고 있었다. 동진(東晉)의 승려 법현(法顯, 337-422)이
인도[天竺]를 유람한 일을 기록한 다음의 자료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G. 무릇 중인도에서는 이 나라의 도성(都城)인 파련불읍이 제일 컸다. 성안 사람들은
부유하고 융성하며 다투어 인의(仁義)를 행했다. … 이 나라의 장자와 거사는 각각 성
안에 복덕의약사(福德醫藥舍)를 세우고 있었다. 그리하여 중인도에서 궁핍한 이, 고
독한 이, 장애인과 일체의 병자들은 모두 이 복덕의약사에 와서 여러 가지 것을 공급
받았다. 여기서 의사는 병을 진찰하고 음식과 탕약(湯藥)을 주어 안락하게 하고, 차
도가 있는 사람은 스스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었다.38)
위 자료 G는 법현이 399년 장안을 출발하여 13년 4개월에 걸쳐 인도 여러 나라를 여행
하면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기록한 뺷고승법현전뺸이다. 그는 당시 갠지스강 남쪽에 있는 중
인도 최대 왕국 마가다(Magadha)국의 수도 파련불읍 즉 파탈리푸트라(Pātaliputra)에
머물면서 부유한 장자들과 불교도인 거사들이 가난하고 돌보아 줄 가족이 없이 병든 이들
을 위해 운영하는 복덕의약사(福德醫藥舍)에 대해 소개하였다. 이는 사찰이 아닌 민간에
서 이루어진 치료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법현은 중인도 마가다국을 여행하면서, 부유한 자와 불교도들이 가난하고 병든 이들이
37) (後秦)龜茲國 三藏 鳩摩羅什 譯, 뺷梵網經뺸 제2권, 梵網經盧舍那佛說菩薩心地戒品第十, “十重大戒 … 若
佛子! 見一切疾病人, 常應供養如佛無異, 八福田中看病福田, 第一福田. 若父母師僧弟子疾病, 諸根不具・百
種病苦惱, 皆養令差, 而菩薩以惡心瞋恨, 不至僧房中, 城邑曠野山林道路中, 見病不救者, 犯輕垢罪.”[고려대
장경 K0527 v14, 322c22].
38) 뺷고승법현전뺸 1권, “凡諸中國唯此國城邑爲大, 民人富盛, 競行仁義, … 其國長者・居士, 各於城內, 立福德
醫藥舍. 凡國中貧窮・孤獨・殘跛, 一切病人皆詣此舍, 種種供給. 醫師看病, 隨宜飮食及湯藥, 皆令得安, 差者
自去.”[K1073 v32, p.749c01].
18 ┃ 연세의사학 제23권 제2호
의사와 음식 그리고 탕약을 제공하여 충분히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는 것을 중국에 전
하였다. 복덕의약사란 복과 덕을 짓는 의약사란 의미로서 자선병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
다. 장자와 거사들이 운영비를 제공하고 병자들은 대부분 무료로 이용하였을 것이다. 의사가
상주하며 약으로 치료하였다는 것으로 보건대, 오늘날 민간 병원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법현이 복덕의약사를 소개한 것은 중국의 부유한 이와 불교도들도 마가다국의 사례를
본받기를 기원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국가에서 미처 보살피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들 가운
데 가난하며 병든 자를 돌보라는 불교의 가르침은 중국 남북조 시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불교도들이 가난하며 병든 자인 비전을 보살피는 것이 상례가 되었기 때문이다.
H-① 위나라 영원장군 후막진인(侯莫陳引)은 [기원사를 지었다] 본래 한나라 중산정
왕(中山靖王)의 아들로서 한나라가 멸망한 뒤에 비로소 풍국(豊國)을 소유하여 후(侯)
로써 성씨를 삼고 드디어 진(陳)이라 하였다. 기원사 등의 절을 지었으며 항상 재(齋)
와 강(講)을 영위하였고, 비전(悲田)을 베풀었다.39)
H-② 정묵이 열반하려 할 적에는 넓은 복전(福田)을 덕미에게 위탁했다. 그래서 덕
미를 으뜸으로 삼아 행했으니 비전(悲田)과 경전(敬田)을 해마다 한 번씩 행했으며,
또 동이에 가득한 돈은 늦여름에 항상 널리 보시했다.40)
위 자료 H는 위나라 장군 후막진인과 수말당초의 승려 덕미가 비전을 베푼 사례를 소개
한 것이다. H-①의 후막진인은 인도의 기원정사를 본받아 기원사를 만들었으며, 승려들이
주재하는 재(齋)와 강(講)을 열었다. 또한 그는 가난하고 병든 이를 위한 비전을 베풀었다.
H-②의 수나라 승려 정묵이 사후 자신의 복전을 제자 덕미에게 부탁하였다. 이에 덕미는
정묵이 남긴 재산으로 비전을 베풀었다는 것을 전하고 있다.
이외에도 당나라 초기 재주(梓州) 통천사의 승려 혜진(慧震)이 66세의 나이로 죽자, 그
의 형제 3인이 돈 50만전을 희사하여 묘소에서 스님과 비전(悲田)에게 보시하였다.41) 당
39) 뺷변정론뺸 4권, “魏寧遠將軍侯莫陳引[造祇園寺]. 本漢中山靖王之胤, 涉漢已來, 肇有豐國, 因侯而氏, 遂號
陳焉。造祇園等寺, 常營齋講, 及施悲田.”[K1076 v33, p.30b01].
40) 뺷법원주림뺸 86권, 懺悔篇.[K1406 v39, p.1160c01].
41) 뺷법원주림뺸 33권, “唐梓州通泉寺釋慧震, … 春秋六十有六. 停喪待滿香氣猶存. 兄弟三人各捨錢五十萬, 於
墓所作僧德施及以悲田.”[K1406 v39, p.612a01-627c15].
동아시아 병원의 기원 ┃ 19
나라 초기 장안의 보광사(普光寺) 법상(法常)은 자신이 입고 먹는 의복과 음식은 낡고 거
칠었으나 해마다 장안에서 비전(悲田)과 경전(敬田)이라는 두 가지 보시 모임을 열고 사
람들을 제한 없이 공양하였다.42) 즉 당나라 초기에 승려들 사이에서 가난하고 병든 자들
을 위해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을 보시하는 비전 행위는 매우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었
던 것이다.
4. 승려의 치료와 불교 의학서
뺷사분율뺸의 간병계에 따르면, 승려는 기본적인 의약지식을 가져야 했으며 부처님의 말
씀으로 병자의 심신을 함께 치료해 줄 수 있어야 했다.43) 따라서 이들 병자를 간호하던 승
려들 가운데 뛰어난 의승들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8세기 일본의 경우 간병선사 수백여 명이 퇴위한 쇼무 덴노(聖武天皇, 701-756)의 치
료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쇼무 덴노의 경우, 750년 병이 나자 왕위를 고켄 덴노(孝謙天皇)
에게 물려준 뒤 궁정이 아닌 야쿠시지(藥師寺)로 옮겨 치료를 받았다.44) 당시 치료에 동원
된 간병선사 326명은 756년 쇼무 덴노의 사후 모두 상을 받았다.45) 쇼무 덴노가 궁정이
아닌 사찰로 옮겨 치료를 받았다는 것은 야쿠시지의 병원 공간이 일본 내에서 가장 우수하
였기 때문일 것이다.
승려들이 행하는 치료는 불교 의학에 의거하여 시행되었을 것이다. 치료를 담당하였던
승려들은 의서를 찬술하기도 하였다. 승려들이 찬술하였던 의서는 남북조 시대에 집중적
으로 편찬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뺷신당서뺸 예문지에서 소개하고 있는 불교계통의 의서
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42) 뺷속고승전뺸 15권, “歲建檀會, 終盡京師, 悲敬兩田無遮供養, 自所服用, 麤弊而已.”[K1075 v32, p.1075b08-b09].
43) 이현숙, 「치유 공간으로서의 한국고대 사찰」, 193.
44) 뺷續日本記뺸 권18, 天平勝寶 2년 2월 무진일[이근우 역, 뺷속일본기뺸 2(지식을 만드는 사람들, 2012),
349]; 이현숙, 「치유 공간으로서의 한국고대 사찰」, 197. 이 글에서 필자는 쇼무 덴노를 몬무 덴노
로 오기하였다.
45) 이현숙, 「치유 공간으로서의 한국고대 사찰」, 197-199.
20 ┃ 연세의사학 제23권 제2호
표 1. 뺷신당서뺸 권65 예문지 3 의서 중 승려 찬술 의학서
의서 이름
저자
권수
비고
1
석승광침구경(釋僧匡針灸經)
승광(僧匡)
1권
침구서
2
석승심약방(釋僧深藥方)
승심(僧深)
30권
심사방으로 통칭
3
제약이명(諸藥異名)
사문 행구(沙門行矩)
8권
본초서 계통
4
마하출호국방(摩訶出胡國方)
마하 호사문
(摩訶 胡沙門)
10권
5
용수보살약방(龍樹菩薩藥方)
용수(龍樹)
4권
용수보살의 약방
6
용수보살화향법(龍樹菩薩和香法)
용수
2권
용수의 향법
7
용수보살양성방(龍樹菩薩養性方)
용수
1권
용수의 양생법
8
서역바라선인방(西域波羅仙人方)
미상
3권
9
서역명의소집요방(西域名醫所集要方)
미상
4권
10
바라문제선약방(婆羅門諸仙藥方)
미상
20권
인도 브라만의 약방
11
바라문약방(婆羅門藥方)
미상
5권
인도 브라만의 약방
12 기파소술선인명론방(耆婆所述仙人命論方)
미상
2권
부처제자 기파의 방서
13
건타리치귀방(乾陀利治鬼方)
미상
10권
Kandari지역 방서
14
신록건타리치귀방(新錄乾陀利治鬼方)
미상
4권
Kandari지역 방서
뺷신당서뺸 예문지 의서(醫書)류에 남아있는 불교계통의 의학서는 총 14종이다. 이 가운
데 11종이 인도 의서를 만들어진 것을 한역한 것으로 보이므로 실제 중국 승려가 찬술한
것은 3종에 불과하다. 뺷수서뺸 경적지 의서류와 비교해보면, 뺷석도홍방(釋道洪方)뺸이 뺷신
당서뺸에는 빠져있다. 도홍은 북제(550-577)의 승려였는데, 그가 찬술한 의서는 아마도 당
대에는 전해지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뺷석승광침구경뺸은 승광(僧匡)이 남북조시기 승려들 사이에서 전수되어 온 침구비법들
을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뺷제약이명뺸은 인도 의서에 나오는 약명에 대해 서술한 것으로
생각된다. 뺷석승심약방뺸은 남조의 승려 심사(深師)가 저술한 의서로, 현전하지는 않지만
후대에 뺷심사방뺸으로 통칭되면서 수많은 의서에 인용되어 있다. 조선의 뺷향약집성방뺸과
뺷동의보감뺸에도 인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시공간을 넘어 사용될 정도로 효험이 뛰어난
처방들이 있는 의학서로 파악된다.
대부분의 불교 의학서는 남북조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불교 의학서는 불교 승
동아시아 병원의 기원 ┃ 21
려들 사이에서 널리 공유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 사찰은 질병 치료를 위한 공
간뿐 아니라 인력과 의술까지 갖추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Ⅲ. 당송대 비전양병원과 동아시아 빈민의료기관
지금까지 7세기 중엽 도선의 뺷계단도경뺸을 통해 이상적인 사찰의 모습에는 병자를 위한
병원이라는 공간이 존재하였으며, 이는 인도 사찰에서 유래하였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인
도 사찰을 모범으로 하여 건립된 중국 사찰에서는 이를 충실히 따르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아픈 병자를 위한 공간은 병원 또는 병방이라고 하여 송대까지 사찰 내 필수공간으로 자리
매김하였다.
사찰 내의 계율인 뺷사분율뺸과 뺷선원청규뺸를 통해 교종과 선종 사찰 내에서 아픈 승려가
어떻게 관리되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불교 의학서를 통해서 사찰 내에서 치료 공간뿐 아
니라 병자를 치료하는 의료 인력도 존재하였던 것을 살펴보았다. 고대사회에서 병자를 수
용하여 치료할 수 있는 민간 내 유일한 곳이었다.
사찰은 병자를 돌볼 수 있는 공간과 인력이 준비되어 있었으므로, 승려뿐 아니라 민간인
들의 치료도 담당하였다. 그런데 사찰에서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위해 숙식을 제공하는 공
간을 비전원이라고 하였으며, 병든 이를 치료를 해주는 공간을 요병원(療病院) 또는 양병
원(養病院)이라고 하였다. 사찰 내 치료공간이 어떻게 국가기관이 되어 빈민병원으로 변화
하였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사찰 내에 일반인을 위한 치료기관에 대한 기록은 일본에서 가장 먼저 찾아볼 수 있다.
594년 일본 쇼토쿠(聖德) 태자가 현재 오사카 지역인 나니와에 건립한 시텐노지(四天王
寺)에 승려의 숙소이자 설법 도량인 경전원(敬田院), 공중병원 성격인 요병원(療病院), 신
원을 알 수 없는 자를 수용하는 비전원(悲田院), 약초를 재배하고 약초를 지어주는 시설인
시약원(施藥院)으로 이루어진 4개의 원을 병설하였다고 한다.46) 그러나 그 근거 자료가
쇼토쿠 태자 사후 3백년 뒤 태자신앙이 유행하던 시기에 만들어진 뺷쇼토쿠태자전력(聖德
太子傳曆)뺸이라서 전설로 취급되고 있다.47)
그런데 중국 당대에 이르러 기존 사찰에서 운영하던 비전원을 이용하여 병들고 가난한
46) 후쿠나가 하지메 지음, 신영전・최선우・이준석・다나카 신이치 옮김, 뺷일본병원사뺸(한울, 2017), 40-42.
47) 看護史硏究會 編, 뺷看護學生のための日本看護史뺸(醫學書院, 1989), 12; 후쿠나가 하지메, 뺷일본병원사뺸, 418.
22 ┃ 연세의사학 제23권 제2호
자를 수용하여 돌보는 것이 국가적인 제도로 변모하였다. 이것이 전국적으로 확대된 것은
현종대로 보이니 다음의 자료가 그것이다.
I-① 개원 5년(717) 송경이 아뢰기를, “비전양병(悲田養病)은 장안 이래로부터 설치
하여 담당자를 두어 국가가 고아와 곤궁한 자를 불쌍히 여기고 노인을 공경하여 병
을 치료하여 편안히 보살피는 데 이르러서는 각기 담당관이 있었습니다. …”48)
I-② 개원 22년(734) 경성에서 구걸하는 이가 없도록 하였다.49)
I-③ 빈자원(貧者院): 뺷사시(事始)뺸에 이르기를, “개원 22년 경성에서 구걸하는 이가
없도록 관에서 병방을 설치하고 구휼식을 지급하였는데, 비전원에서도 하여 혹 양병
원이라고도 하였다.”라고 그 시원을 기록하였다. 뺷당회요뺸를 살펴보면, 개원 5년 송
경과 소정이 아뢰기를, “비전원에서 병을 돌보는 것은 장안(으로 도읍한) 이래로 비
전이라 칭하는 곳에 사(使)와 전지(專知) 관리를 두었는데, 불교가 관련하여 이는 승
니가 맡아서 하도록 하였습니다. 개원 23년에 여러 사찰에도 설치하였다고 하였습
니다.”라고 하였다. 장안 중에 처음 설치하였다는 글로 미루어 보건대, 그전부터 있
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뺷사시뺸에서 구휼식을 지급한 시원을 여기에서 기원하였다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 송조에서도 이로 인하여 승원(僧院)을 복전이라고 하였는데,
지금 또한 비전이라고 한다.50)
위 자료 I는 당대에 운영되었던 비전양병방에 대한 것이다. 자료 I-①은 717년(개원 5)
송경의 상소문을 통해 장안이 도읍이 되었던 건국 이래 빈곤한 자와 가족이 없는 고아와 노
인을 수용하고 치료를 해주는 비전양병이라는 국가기관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존
의 비전원과 양병원이 결합된 상태였다. 그런데 I-②는 735년(개원 22)에 현종은 장안 거
리를 떠도는 걸인을 없애도록 조칙을 내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유달리 걸인들이 많았
기 때문에 내려진 조치였을 것이다.
48) (宋)王溥 撰, 뺷唐會要뺸 권7, “病坊, 開元五年, 宋璟奏. 悲田養病, 從長安以來, 置使專知, 國家矜孤恤窮,
敬老養病, 至於安庇, 各有司存. …”
49) (後晉)劉昫 撰, 뺷舊唐書뺸 권8, 현종 상, 開元 22년, “是歲, … 斷京城乞兒.”
50) (宋)髙承 撰, 뺷事物紀原뺸 권7, 庫務職局部 34, 貧子院.
동아시아 병원의 기원 ┃ 23
I-③는 당시의 상황을 좀더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고 있다. 즉 송대 고승(髙承)은 뺷사물기
원뺸에서 빈자원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기존에 기원을 설명하던 뺷사시뺸의 기록이 잘못되었
음을 지적하였다. 그는 뺷당회요뺸의 기록을 근거로 장안이 수도가 된 이래로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빈자원 개념의 국가 기관이 있었으며, 빈자원 운영은 원래 승려들이 맡아서 하는
직임이었다는 것을 밝혔다. 그는 송대에도 이를 계승하여 사찰 내에 가난한 자를 돌보는
비전이 있다고 하였다. 즉 당초에 이미 국가기관으로서 승려들이 비전양병방을 운영하였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제도가 735년 이후 장안뿐 아니라 각지의 사찰로 더욱 확대
운영된 것이다. 아마도 황제가 제액(題額)하고 재정적 지원을 한 사액사찰이 주로 이를 담
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820년 당 무종이 폐불정책을 시행하면서 전국에 있는 사찰을 폐지하였을 때, 가
장 큰 문제가 되었던 것이 바로 사찰에서 운영하였던 비전양병방(悲田養病坊)이었다. 전
국 각지의 사찰에서 운영하던 비전양병방을 담당하던 승려들이 강제 환속을 당하자 이를
운영할 주체가 사라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강제 환수된 사찰 전답의 일부를 급하게 지급하여 지속적인 운영을 도모하였으니,
다음의 자료가 그것이다.
J. 회창 5년 11월에 이덕유가 상소하여 이르기를, “가난한 이는 구휼하고 병든 이는
부역을 면제한다는 것은 주례에 나타나 있으며, 의지할 곳 없는 이가 늘 굶주리는 것
은 왕제에 있어왔습니다. 국조에서 비전양병(悲田養病)을 세우고 전담할 이를 두었
는데, 개원 5년 송경이 비전(悲田)은 불교와 관련되어 이것이 승니가 관장하는 직임
(職任)이 되었기에 담당관 제도에 맞지 않다고 상소하였지만, 현종께서 허락하지 않
으셨습니다. 개원 22년에 경성에 걸인이 없도록 모두 병방에서 거두어 관장하도록
하고 관에서 본전으로 이자를 거두어 지급하였습니다. 지금 여러 도의 승니들이 모
두 환속을 다 하였기에 비전방에는 주관할 사람이 없어졌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이
와 사고무친한 이들이 반드시 크게 곤경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신(臣)들이 헤아려 보
건대, 비전(悲田)은 불교에서 나왔으나 또 고쳐서 양병방으로 하였습니다. (장안과
낙양) 양경(兩京)과 여러 주에 각기 녹사와 (나이 많은) 기로(耆老) 가운데 명망이 있
고 믿을 만하여 마을에서 칭송이 있는 한 명을 택하여 이를 담당하도록 하고, 바라건
대 양경에서는 사전(寺田) 10경을 지급하고 큰 주와 진(鎭)에는 전(田) 7경을 지급하
24 ┃ 연세의사학 제23권 제2호
고 기타 나머지 주에는 관찰사가 가난하고 병든 이의 많고 적음을 헤아려 전 5경을
지급하여 죽값에 충당하도록 하며, 관전(官錢)에 여유가 있는 주진에는 예치한 본전
을 헤아려 이자를 거두도록 하여 임편(稔便)을 가장 우선으로 하십시오.”라고 하였
다. (이에) 칙명을 내리기를, “비전양병방을 담당하던 승니들이 환속하여 주관할 사
람이 없으므로 잔질(殘疾)인 자에게 지급될 것이 없을까 두려우니, 장안과 낙양은 사
전(寺田)을 헤아려 지급하여 구제하고, 여러 주와 부에서는 7경(頃)부터 10경까지 각
각 본래 두었던 곳에서 기로인 1명을 선발하여 담당하고 죽값에 충당하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51)
위 자료 J는 845년 4월부터 8월까지 전국 각지의 불교 사찰을 폐쇄하고 승려들을 모두
환속 조치한 뒤, 사찰 내에 설치하였던 비전양병방의 운영문제에 대한 것이다. 당시의 재
상 이덕유(787-849)는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비전양병방이 국초부터 존재하여 관전의 이
자로 운영되었음을 밝힌 뒤, 폐불 정책으로 사찰 내에 거주하던 이들이 당장 갈 곳이 없어
진 상황에 대한 대처법을 제시하였다. 이덕유는 비전양병방을 운영하던 승려가 사라졌으므
로, 해당 지역에서 70세 이상 명망있는 기로인을 선발하여 대신 관장하도록 하는 대안책을
상소하였다. 무종은 이를 받아들여 장안 및 낙양의 두 곳에는 사찰이 가지고 있던 사전에서
해당 비용을 지급하고, 지방에는 원래 보유하고 있던 7경에서 10경까지에 해당하는 소출을
기반으로 하는 관전의 이자를 가지고 각지의 기로인들이 운영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무종은 845년 11월 조칙에서 비전양병방에서 수용하는 대상이 주로 잔질자였음을 밝혔
다. 잔질이란 독질과 폐질이 혼자서 거동조차 할 수 없는 중증 장애상태임에 비해 그나마
혼자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부류이다.52) 잔질자는 국가가 구휼해야 할 대상이었는
데, 이를 비전양병방에서 담당해왔던 것이다.
무종은 846년에 사망하므로, 전국 각지에서는 훼손된 사찰을 복구하고 환속한 승려들이
다시 머리 깎고 출가하는 일들이 일어났다. 기로인들이 가져갔던 비전양병방의 운영권이
다시 승려들에게 넘어갔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717년 송경의 상소문에서 지적하
였듯이 승려들이 국가 관부에서 행하는 일을 대신 한다는 점은 관료들에게는 고민거리였
51) 뺷事物紀原뺸 권7, 庫務職局部 34, 貧子院.
52) 이현숙, 「원 법제 도입에 따른 장애인 정책의 변화」, 뺷역사와 현실뺸 95, 2016에서 독질・폐질・잔질
에 대해 상론하였다.
동아시아 병원의 기원 ┃ 25
을 것이다.
그런데 다음의 자료는 비전양병방이 당나라 주요 도시마다 있었으며, 특히 사람들의 왕
래가 많은 시장에 설치되었던 것을 보여준다.
J-① 성도(成都)의 걸인 엄칠사는 시커멓고 비루한 천민이었다. 얼굴에는 때가 꼈고
몸에는 악취가 심해 가까이 할 수가 없었다. 말씨도 단정치 않았으나 때때로 올 일을
미리 맞추는 재주가 있었다. 그는 서시(西市)의 비전방에서 살고 있었다. … (칠사는)
4, 5년 동안 사람들이 앞다투어 도와주었는데 돈과 비단을 얻을 때 마다 모두 도관을
수리하는데 사용하면서, “절을 어찌 수리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조만간 절이 훼철
될 조짐을 알았기 때문이다. 지금 그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53)
J-② 위촉(僞蜀) 대동(大東)의 저자에 양병원(養病院)이 있었는데, 걸인과 가난하고
병든 자가 모두 거주할 수 있었다54)
위 자료 J-①은 무종의 폐불 시기에 사천성 성도의 엄칠사에 관한 이야기이다. 엄칠사는
시장에서 구걸하는 걸인으로 비루한 천민이었지만 4-5년간 구걸하였던 재물을 모두 도교
의 도관을 수리하는 데 썼다. 조만간 사찰들이 모두 파괴될 것을 엄칠사가 미리 알았기 때
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성도의 서쪽 시장에 있던 비전방에서 살고 있었다. 승려들
이 관장하였던 비전원이지만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시장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그 구역을
비전방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엄칠사가 지내던 곳을 비전방이라고 하였지만, 현종과 무종대 자료를 보면 공식적인 명
칭은 비전양병방이었다. 가난하고 병든 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병을 돌보는 곳이므로,
빈민병원의 성격을 가졌던 것이다. 이는 도선이 언급하였던 사찰 내 이상적인 병원 공간과
는 다르다. 약과 침뜸으로 병을 치료하기 보다는 병자들을 모아 요양시킨다는 성격이 강하
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양병원 또는 양병방이라고 불리웠던 것으로 생각된다.
위 자료 J-②의 저자 황휴복은 함평(998-1003) 연간 이전 사람으로, 전촉(前蜀,
53) (唐)段成式 撰, 뺷酉陽雜爼續集뺸 권3, 支諾臯下, “成都, 乞兒嚴七師, 幽陋凡賤, 塗垢臭不可近, 言語無度,
往往應於未., 居西市悲田坊, … 凡四五年間, 人争施與, 每得錢帛, 悉用修觀, 語人曰: 寺何足修? 方知折寺
之兆也, 今失所在.”
54) (宋)黄休復 撰, 뺷茅亭客話뺸 권3, 淘沙子, “僞蜀大東市有養病院, 凡乞丐貧病者, 皆得居之.”
26 ┃ 연세의사학 제23권 제2호
907-925) 시기에 있던 일을 소개하였는데, 당시 변방 도시의 상황을 보여준다. J-②를 통
해 후촉(後蜀)의 수도 대동에 있는 시장 거리에 걸인이나 가난한 자와 병든 이들이 거주하
는 공간인 양병원(養病院)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새로이 건립된 것이
아니라 당대에 이미 설치되어 있었을 것이다. 즉 장안이나 낙양뿐 아니라 전국 각지의 대
도시에는 비전양병원이 실재 존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도의 비전방과 대동의 양병방은 모두 저자 거리에 설치되었으며, 걸인과 가난하거나
병든 자들이 숙식하였다는 점에서 동일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에는 비전원 또는 양
병방이라고 함께 불리웠는데, F와 G의 자료에서 보듯이 공식명칭은 비전양병방이었을 것
이다.
송대에는 국초부터 개봉부의 동쪽과 서쪽에 복전원을 설치하였는데, 이는 당대의 비전
양병방 제도를 이은 것이었다.55) 노인과 병든 자, 그리고 고아와 가난한 자들을 대상으로
하였는데, 초기에는 겨우 24인에게 돈과 곡식을 지급할 수 있었다.
영종대(1032-1067)에 이르러 남쪽과 북쪽에 복전원 두 곳을 더 설치하였는데, 각각 하
루에 300명씩 구휼식을 지급할 수 있었다고 한다.56) 복전원은 승려가 사무를 관장하였는
데, 정부에서 판관(判官)과 사상사진(四廂使臣) 등을 파견하여 시찰하도록 하였다.57) 하
루 총 1,200명까지 구휼식을 지급하였다는 것은 복전원이 사고무친하여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가난한 자의 병을 치료했다기 보다는 굶어 죽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음식을 제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기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 뺷부상약기(扶桑略記)뺸에 따르면, 723년 고묘(光明: 701-760)황후가 황태자비 시
절 고후쿠지(興福寺)에 시약원(施薬院)과 비전원(悲田院)을 설치하였다고 한다.58) 즉 고
묘왕후가 왕후관직 내에 시약원을 신설하고 도다이지(東大寺)를 시작으로 70여개의 고쿠
분지(國分寺)를 설치하였는데, 그 경내에 시약원과 비전원을 설치하였다는 것이다.
717년 당나라에서 시작된 제도가 불과 6년 만에 일본에 수용되었다는 점은 비전원이라
는 제도가 그 이전부터 중국에 있었으며, 동아시아에서 불교와 정치권력의 결합이 공고해
55) 郭文佳, 뺷宋代社会保障文化研究뺸(中国文史出版社, 2014), 189.
56) 뺷宋史뺸 권131, 식화지 상, 진휼, “京師舊置東・西福田院, 以廩老疾孤窮丐者, 其後給錢粟者才二十四人. 英
宗命增置南・北福田院, 並東・西各廣官舍, 日廩三百人, 歲出內藏錢五百萬給其費, 後易以泗州施利錢, 增為八
百萬.”
57) 복전원 이외에도 또한 1106년 송 휘종연간과 1131년에는 고아들을 양육하는 거양원이 건립되었다
고 한다. 郭文佳, 뺷宋代社会保障文化研究뺸, 190-193.
58) 岩本健寿, 「奈良時代施薬院の変遷」, 뺷早稲田大学大学院文学研究科紀要뺸 第4分冊54巻, 2008.
동아시아 병원의 기원 ┃ 27
지면서 일본에서도 이를 수용하였음을 보여준다.
비록 현재 남아있는 기록은 없으나, 신라에서도 당나라의 비전원과 양병원 제도를 수용
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뺷삼국유사뺸에 나오는 김현감호 설화에서 호랑이에게 물린 상처를
치료하는 약으로서 흥륜사의 된장과 나발소리를 제시한 것은 이러한 의식의 산물일 것이
다. 흥륜사는 신라 최초의 사찰로서 뺷삼국유사뺸에 성덕공주와 선덕여왕의 치병설화가 남
아있는 곳으로 흥륜사 내에 시약원이나 요병원 같은 공간이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59)
현재 남아있는 자료가 없어서 더 이상의 논의가 어렵지만, 정황상 충분히 가능하다.
고려시대 동서대비원은 1036년(정종 2)에 동대비원을 수리하도록 한 것을 보면60) 이미
그 이전에 설치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61) 고려의 동서대비원은 당나라의 비전양병방 제도
를 수용한 제도로서 신라의 경험이 내재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동서대비원 가운데 서대비
원은 개경의 서쪽 보국사 옆에 있었다.62) ‘대비원’이라는 용어에서 당나라의 사례처럼 사
찰에서 운영하던 빈민의료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즉 당 현종대 비전방을 운영하는 사
찰에 재정적 지원만 하다가 점차 승려 대신 국가 관료가 이를 전담하게 되었듯이, 대비원
이 처음 설치되었을 때는 보국사에서 운영하였다가 점차 정식 관원이 설치되고 국가 기관
화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Ⅳ. 병원과 의원
그렇다면 유럽의 hospital 또는 infirmary에 해당하는 한자어 번역을 ‘병원’이라고 한
것은 어디에서 기원하였을까? 이는 16세기 중엽 포르투갈 제수이트 선교사들이 동아시아
에 오면서 시작되었다.
1557년 포르투갈의 예수회 소속 의료선교사였던 루이스 데 알메이다(Luis de
Almeida)는 후나이(府內, 현재 오이타현 오이타시)에 서양식 병원을 세웠는데, 이는 일본
최초의 병원으로 알려져 있다. 알메이다는 포르투칼의 해외거점에 있던 인도 고야에서 8
59) 이현숙, 「치유 공간으로서의 한국고대 사찰」, 209-210.
60) 고려의 동서대비원 제도에 대해서는 이경록, 「고려 전기의 대민의료체제」, 뺷한국사연구뺸 139, 2007
참조.
61) 뺷고려사뺸 권80, 식화지3, 水旱疫癘賑貸之制, 정종2년 11월조.
62) 뺷高麗古都徵뺸 권7, 東西大悲院, “뺷松都誌뺸云, 龍首山南, 有大悲峴, 疑因院名, 其在補國寺傍者爲西院, 而
在龍首山南者爲東院與?”
28 ┃ 연세의사학 제23권 제2호
년간 향신료 무역에 종사하며 자산을 축적하였는데, 외과의사이기도 하였다. 그는 분고노
쿠니(豊後國)의 영주 오토모 소린(大友宗麟)의 허가를 받아 후나이 병원(府內病院)을 설
립하였는데, 내과 환자와 나병 환자를 위한 병동으로 나누었다고 한다.63)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한 이후 일본 내에서 병원의 설립이 이어졌다. 1585년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사카이 지역에 나병원(癩病院)을 설립하였으며 1591년에
는 나가사키 지쿠고 정에 성 나자로 병원 즉 나병원이 설립되었다. 당시 나병원이란 나병
환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성인 나자로를 상징하는 병원을 의미하기도 하였다.64) 이처럼
유럽에서 온 의료선교사들은 일본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진료기관을 건립하면서 ‘병
원’이라는 용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하였다.
그런데 ‘병원’이란 용어는 제수이트 교단의 선교사로서 중국에 파견되었던 줄리오 알레
니(Giulio Aleni: 艾儒畧, 또는 意大利文, 1582-1649)가 1623에 편찬하였던 뺷직방외
기(職方外紀)뺸 권2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니, 다음의 자료가 그것이다.
K. 또 병원이란 것이 있으니 큰 성에서는 많아 그 수가 10여 곳에 이른다. 중하원은
중하의 사람들이 거처하며 대인원은 귀인들이 거처한다. 귀인과 나그네, 국왕의 명
을 받드는 사신 같은 사람들이 질병을 만나면 이 원(院)에 들어온다. 원은 일반 집들
보다 배나 아름다운데, 필요한 약물은 모두 우두머리가 관장한다. 미리 이름난 의사
들을 갖추어 날마다 병자를 진료한다. 옷과 이부자리 장막 등과 간호하고 돌보는 사
람들이 여럿 있다. (환자는) 병이 나으면 떠나는데,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양식과 여
비를 지급한다. 이는 국왕과 대가(大家)들이 설립하는데 혹 성 안의 사람들이 모두
힘을 모아 만들기도 한다. 달마다 돌아가며 한 명의 대귀족이 그 일을 총괄하는데,
약물과 음식은 모두 친히 스스로 점검하고 살핀다.65)
위 자료에서 유럽의 병원을 소개하는 줄리오 알레니(Giulio Aleni)는 제수이트 교단의
선교사로서 1613년 중국에 와서 36년간 선교하다 1649년 복건성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63) 후쿠나가 하지메, 뺷일본병원사뺸, 55-57.
64) 후쿠나가 하지메, 뺷일본병원사뺸, 62.
65) (眀)艾儒畧 撰, 뺷職方外紀뺸 권2 歐邏巴總説, “又有病院, 大城多至數十所, 有中下院, 處中下人, 有大人院,
處貴人. 凡貴人若羈旅, 若使客偶患疾病, 則入此院. 院倍美於常屋, 所需藥物, 悉有主者掌之. 預備名醫, 日
與病者診視.複有衣衾帷幔之屬, 調護看守之人, 病癒而去. 貧者量給資斧. 此乃國王大家所立, 或城中人並力
而成. 月輪一大貴人, 總領其事, 凡藥物飲食皆親自驗視之.”
동아시아 병원의 기원 ┃ 29
유럽의 지리학적 지식과 문물을 중국에 소개하기 위해 뺷직방외기뺸를 저술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위 자료를 통해 알레니가 유럽의 대도시 모습을 소개하면서 국왕과 귀족의 후원
하에 운영되는 의료 기관을 ‘병원’이라고 묘사하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알레니에 따르면, 귀인은 대인원을 이용하고 중하인은 중하원을 이용한다고 계층에 따
라 의료기관이 다른 것을 소개하였다. 그는 병원의 개념으로서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가 있
으며, 약을 공급하고, 공간적으로는 일반 집보다 배나 좋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는 17세
기 유럽의 hospital 제도를 중국에 소개한 것이다. 서양 중세의 병원이란 환자들을 모아
숙식을 제공하며 치료하는 곳이다. 따라서 왕공귀족보다는 주로 중하계층들이 주로 병원
을 이용하였다. 즉 병원이란 중세 기독교문화가 가진 상징으로서 작동하였다. 그런데 가난
한 자를 돌보는 중하원의 경우, 5세기초 중국의 승려 법현이 소개하였던 인도 마가다국의
복덕의약사와 유사하다. 불교와 기독교는 부유하며 신심이 깊은 자들에게 자선의 일환으
로 병원을 운영하도록 한 것이다.
위 자료는 알레니가 유럽의 hospital에 해당하는 건물을 설명하면서 병원이라고 번역한
것을 잘 보여준다. 그가 병원이라고 번역한 것은 이미 포르투칼의 제수이트 선교사들이 일
본에서 병원을 건립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기존 연구에 따르면, 일본에서 병원이라는 용어
는 1787년에 출판된 모리시마 주료(森嶋中良)의 저서인 뺷홍모잡화(紅毛雑話)뺸 1권에 처
음 등장한다고 한다. 즉 이 책의 ‘병원’ 항목에서 ‘명나라에는 가스토후이스(gasthuis, ガ
ストホイス)라는 집이 있어, 명나라 사람들은 이를 병원이라고 번역한다 … 외국에서 오는
사객(使客)과 나라 안의 병자는 귀천(貴賤) 없이 이곳에 머무르며, 의사, 간호인, 침구 등이
마련되어 있다’라고 병원을 설명하였다고 한다.66)
이와 비슷한 시기 조선에서도 1777년(정조 1) 청나라에 사절단의 일행으로 다녀온 이갑
(李𡊠, 1737-1795)은 유럽의 병원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L. 서양국(西洋國)은 서남 바다 가운데 있어 중국에서 가장 서쪽이 되므로 대서(大西)
라고 한다. 중국까지의 이정(里程)을 계산하면 9만 리가 되는데, 배로 6만여 리를 가
서 소서천축국(小西天竺國)에 이르러 육지에 올라 배를 바꿔 타고 2, 3개월을 더 가
야 바야흐로 중국에 이른다. … 대서(大西) 여러 나라가 모두 양병원(養病院)을 설치
66) 김영수, 「근대 일본의 ‘병원’」, 29-58.
30 ┃ 연세의사학 제23권 제2호
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또한 3종이 있다. 병에는 고칠 수 있는 것과 고치지 못할 것이
있으며 또 고칠 수 없는 동시에 전염까지 하는 병이 있는데, 이 세 종류를 각각 경우
를 나누어 병에 따라 구호(救護)한다.67)
위 자료는 이갑이 청나라에서 보고 들은 것을 정리한 내용으로서, 유럽의 hospital을 양
병원으로 소개한 것이다. 알레니의 뺷직방외기뺸에 근거한 내용으로 추정되는데, 알레니가
병원이라고 번역한 것에 비해, 그는 양병원이라고 소개하였다. 아마도 그가 중국인에게 직
접 들었던 내용으로서 당시 중국인들은 여전히 종래 사용해왔던 양병원이라는 용어에 더
익숙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본에서도 일반인을 위한 진료기관에는 양생소 또는 요양소라고 이름하였다. 네덜란드
의 해군 군의였던 폼페(J. I. C. Pompe van Meerdervoort)가 막부의 초청으로 일본에
온 뒤, 1861년 나가사키에 서양의학으로 진료하는 본격적인 서양식 병원인 나가사키 양생
소를 설립하였다. 그런데 1868년 보신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인 의사 윌리스가 요코하마에
임시 군진병원을 개설하였다. 1869년 오사카에 ‘나니와 임시병원’이 개설되고 고베에 고
베 병원이 창설되면서 점차 병원이라는 용어가 hospital의 공식 번역 용어로 정착해 나갔
던 것으로 보인다.68) 김영수에 따르면, 1862년 일본 사절단이 서구의 공공기관을 관찰하
는 과정에서 병원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고, 그 시기를 전후하여 사전에도 병원이라는 단
어가 수록되었다고 한다. 메이지 신정부의 의료위생정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병원이라는
용어는 의료시설을 지칭하는 공식적인 용어가 되었는데, 1874년 의제가 반포되면서 병원
에 관한 조항이 마련되면서 점차 병원이라는 용어가 정착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병원은
메이지정부의 법률에 의해 개념규정이 이루어졌지만, 병원과 함께 쓰이던 의원은 개념이
명확하지 않은 채로 병원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거나 진료소와 더불어 병원의 하위개념
으로 사용되었다.69)
그런데 같은 시기에 일본을 시찰하고 다녀온 조선의 관리는 일본의 병원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67) 李𡊠 撰, 뺷燕行記事뺸聞見雜記 하, “大西諸國. 皆設養病院. 養病院亦有三. 有可醫之病. 有不可醫之病. 又有
不可醫而傳染之病. 此三類. 各分其所. 隨病救護.” 원문과 번역문은 고전번역원DB(https://db.itkc.or.kr)
를 이용하였다.
68) 후쿠나가 하지메, 뺷일본병원사뺸, 78-86; 김영수, 「근대 일본의 ‘병원’」, 54-55
69) 김영수, 「근대 일본의 ‘병원’」, 55.
동아시아 병원의 기원 ┃ 31
M. 또 요병원(療病院)에 갔더니, 의장(醫長, 의사) 10인이 학도 3-4백 명을 가르치
며, 병자(病者) 또한 몇백 인인데, 이불을 덮고 누워 있는가 하면, 어떤 자는 상(床)에
기대어 앉아 있기도 하다. 또 나무를 깎아서 만든 반신인형(半身人形)이 있는데, 장
부(臟腑 오장육부)와 힘줄[筋絡]을 다 갖추어, 마치 옛 동인(銅人: 한의학에서 경혈을
표시하여 만든 구리 인형)의 모양을 닮았다. 또 보니, 뼈를 긁고 살을 베며, 목구멍을
통하고 방광을 조사하는 기구들이 쇠로 만들어져 있다. 또 들으니, 시신(尸身)을 가
지고 해부하여 그 장부를 직접 보고서 병인(病因)을 찾아낸다고 하니 시체는 임자가
없는 것이거나 아니면 사서 구한다고 한다. 놀랍고 괴이함을 차마 말할 수 없다.70)
위 자료 M은 1881년(고종 18) 일본에 파견되었던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의 일원 이헌
영이 자신이 담당한 분야에 대한 보고서이다. 일본의 의제가 반포된 지 7년 이후인데 병원
이 아니라 ‘요병원’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헌영이 시찰한 병원이 어느 곳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학도가 수백명 있다는 것으로 보아 의학교에 부속 병원을 가지고 있던 의학교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그는 오사카에 머물고 있었으므로, 1873년에 설립되었던 오사카대학
의학부의 전신이었던 오사카 부병원이었을 가능성이 크다.71)
이에 반해 중국에서는 상급의료기관으로서는 의원이라는 용어가 더 보편적으로 사용되
었다. 의료를 담당하던 국가기관을 수당대에는 태의서(太醫署)라고 하였다가 송대에 태의
국(太醫局)으로 변경하였는데, 금대 이후 태의원이라고 불렀다.72) 앞장에서 살펴보았듯
이, 병원이란 가난하고 병든 자들이 숙식을 하는 곳이었다. 따라서 중국에서는 서양의학
에 의거한 hospital을 병원이라고 하지 않고 의원이라고 통칭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경우, 중앙의료에는 내의원이 있었으며, 지방마다 의원이 설치되었다. 조선 역시
병원보다는 의원이 더 익숙한 용어였다. 그런데 1885년 1월 17일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근대병원인 제중원(濟衆院)을 건설하기 위해
조선 정부에 병원 건립 제안서인 조선정부경중건설병원절론(朝鮮政府京中建設病院節論)
을 제출하였다.73) 의료선교사였던 알렌은 일본에서 이미 보편화되었던 병원이라는 용어
70) 뺷日槎集略뺸地, 4월 18일 기유, “又往療病院.而有醫長十人, 敎授學徒三四百人. 病者亦爲幾百人, 或蒙衾而
臥, 或依床而坐, 有木刻人形半身, 具臟腑筋絡, 倣古銅人形. 且刮骨割肉納喉探胱之器, 具以鐵爲之. 聞以尸
身剖見臟腑, 驗其病因云, 尸則或無主者, 或許賣者云, 不勝驚怪, 不忍言也.” 원문과 번역문은 고전번역원
DB의 것을 이용하였다.
71) 후쿠나가 하지메, 뺷일본병원사뺸, 391쪽의 「병원 및 병원 관련 연표」 참조.
72) 김남일 외, 뺷중국의학사뺸(대성출판사, 2010), 13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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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사용하였지만, 조선 정부에서 최종적으로 선택한 것은 제중원이었다. 이에 비해 1879
년 9월 존 맥켄지(John Kenneth Mackenzie, 1850-1888)가 리훙장의 지원을 받아 설
립한 의료기관 명칭은 시의원(施醫院)이었다.74) 이와 같이 근대에 서양의료 기관이 동아
시아에 유입되면서 그 명칭에 대해서는 상당기간 혼란을 거쳐야 했다.
Ⅳ. 맺음말
지금까지 동아시아 사회에서 병원의 기원과 그 변화하는 모습에 대해 살펴보았다. 병원
이란 말은 불교 경전을 중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탄생하였다. 667년 도선(596-667)이
인도의 사찰 공간을 소개하면서 사찰에 설치되었던 치료 공간을 ‘병원’으로 번역하였던 것
에서 시작하였다.
도선은 현장의 뺷서역기뺸에서 인용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인도의 경전이 한역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따라서 ‘병원’이라는 용어는 도선이 처음 발명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
다. 그런데 불교 경전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병원은 때로 병방이라고도 번역되었다. 도선
자신이 뺷계단도경뺸과 중인도의 기원정사를 소개하는 두 가지 글에서 ‘병원’ 또는 ‘병방원’
이라고 혼용하여 사용하였다. 이에 반해 한 세대 이후의 의정(635-713)은 이를 ‘병방’이
라고 번역하였다.
승려의 질병을 치료하던 병원 공간은 사찰의 서쪽에 식당과 욕실, 화장실 등과 함께 설치
되었다. 도선이 소개하였던 이상적인 사찰의 모습은 이후 사찰 건축에서 대부분 채택이 되
었음을 1160년에 완성되었던 임안 소재 선림사의 모습에서 확인해 볼 수 있었다. 사찰 내
에는 의료 공간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간병계율에 따라 아픈 자를 보살피는 간병승들이 있
었다. 또한 치료에 일가견이 있는 승려들이 나타나 의승으로 불리웠으며, 불가에서 내려오
는 치료법을 담은 의학서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공공 의료 기관이 발달하지 않았던 고대
사회에서 사찰은 치료 공간과 인력을 보유한 중요한 의료기관이 되었다.
5세기 초 중국 동진의 승려 법현(337-422)은 자신이 인도를 여행하면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글에서 부유한 중인도 마가다국에서 부자 불교도들이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해
73) 신규환, 「한중 선교병원의 “정체성” 논쟁 비교연구: 제중원과 시의원의 사례를 중심으로」, 뺷동방학지뺸
172, 2015, 170.
74) 신규환, 「한중 선교병원의 “정체성” 논쟁 비교연구」.
동아시아 병원의 기원 ┃ 33
운영하는 ‘복덕의약사’라는 빈민병원을 소개하였다. 법현은 복덕의약사에서 의사들이 약
으로 병자들을 나을 때까지 치료한다고 전하였다. 불경에서는 가난하고 병든 자를 부처님
섬기듯이 보살펴야 한다고 강조하였기 때문에, 중국 남북조 이래 승려와 불교도들 사이에
가난하고 병든 비전(悲田)을 보살피는 일들이 칭송되었다.
중국 사찰 내의 병원은 아픈 승려를 위한 공간이었다. 승려나 불교도 사이에 가난하며 아
픈 자를 구제하는 비전은 복덕을 짓는 중요한 행위였다. 따라서 빈민 의료가 행해지는 공
간은 비전원으로 불리웠는데, 이것이 빈민 치료기관으로 제도화된 것은 당대에 이르러서
였다. 특히 현종은 길거리에 있는 병든 부랑자를 위하여 비전양병방을 설치하도록 하고 이
를 승려들에게 위임하였다. 즉 사찰에서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구제하는 비전원이 국가의
구휼정책과 결합하여 그 댓가로 사전(寺田)을 지급받게 됨에 따라, 승려가 국가 관리의 직
임을 겸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장안과 낙양 두 곳에 설치되었던 비전양병방
은 곧 전국의 대도시마다 설치되었다. 이러한 비전양병방 제도는 인근 국가로 전파되었는
데, 8세기 일본의 비전원제도와 11세기 고려 동서대비원 제도의 기원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16세기 일본에 서양 의료선교사가 들어와 유럽의 hospital과 같은 치료기관을 설립할
때 기존 불교에서 사용되던 병원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이후 일본 내에 건립되었던 일
반민을 위한 치료 기관을 병원이라고 명명하였다. 1623년 제수이트 교단의 선교사로서 중
국에 파견되었던 줄리오 알레니(Giulio Aleni)는 서구의 문물을 소개하였던 뺷직방외기(職
方外紀)뺸에서 유럽의 hospital을 병원이라고 번역하였다. 이는 당송 이래로 가난하고 아
픈 병자를 위해 비전양병원이라는 제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16, 17세기 동아시아에
서 포교활동을 하던 제수이트 선교사들은 불교 사찰에서 운영하던 병원과 중세 유럽의
hospital은 서로 일맥상통하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1777년(정조 1) 청나라에 다녀온 조선의 이갑은 서양의 hospital을 요병원이라고 소개
하였다. 이갑은 서양에는 치료가 가능한 자와 불가능한 자, 전염병에 걸린 자 등을 수용하
는 세 종류의 요병원이 있다고 하였다.
당송대를 거치면서 사찰 내 승려를 치료하는 공간은 무상원・열반당, 또는 연수원・성행
당 등의 명칭으로 변화하였으며, 가난하고 병든 자를 치료하는 공간은 비전원 또는 비전양
병방으로 불리웠다. 이로 인해 병원이라는 용어에는 병들고 가난한 자들이 숙식하는 곳이
라는 관념이 오래도록 남아있었기 때문에, 상급 의료기관을 병원이라고 부르기까지 상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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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이 걸렸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중국에서는 최상급의 진료기관을 의원이라고 하는
데, 명청대에 태의원이라는 국가의료기관이 왕공 관료들의 진료를 담당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근대 신분사회에서 의사보다 신분이 높은 환자는 의사가 환자의 집으로 왕진하
여 치료를 하였다. 따라서 전근대 의원에는 환자가 숙식하는 기능은 없었다.
조선시대 중앙에는 내의원, 그리고 지방에는 ‘의원’을 국가에서 운영하였기 때문에, 의
원이라는 용어가 더욱 익숙하였다. 현재 우리가 병원으로 사용하는 것은 일본의 식민지 경
험 때문이며, 해방 이후 일본의 의료법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았던 연유가 크다고 하겠다.
핵심어: 병원, 고대 사찰, 비전방, 양병방, 동서대비원, 구휼, 고대 동아시아, 의원
논문 투고일: 2020.11.5.
심사 완료일: 2020.11.17.
게재 확정일: 2020.12.17.
동아시아 병원의 기원 ┃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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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Origin of Hospital(byung-won) in East Asia
75)Lee
*
Hyun-sook
This paper aims to research for the origin of byung-won(病院, Ch. bìngyuàn)
in East Asia. Hospital or Infirmary used to be a place of curing sick people in
medieval Europe. From the 16th century it was introduced and translated to
bingyuan in China and byo-in in Japan by Jesuit missionary. In 16th and 17th
century Jesuit missionaries translated European hospital into Chinese
bingyuan, because it seems that they found similar one in Buddhist temple.
Actually the Bingyuan was originated from ancient Indian temples. In 667
Daoxuan(596-667) introduced the ancient Indian temple and he translated the
healing space for sick monks in temple as ‘bingyuan(病院)’ or ‘bingfangyuan(病
坊院)’. According to Daoxuan, the bingyuan, which was used to provide the
treatment to sick monk, was set up along with restaurant, bathroom, and
restroom in western part of temple. The ideal temple including bingyuan that
Daoxuan had introduced was also found in the architecture of the temple in
Song China.
In Buddhist scriptures, it used to emphasize the salvation of the poor and the
sick. Since Faxian(法顯, 337-422) had introduced a kind of charity hospital,
fude- yiyaoshe (福德醫藥舍) in The Journey of Faxian to India, there were many
anecdotes to rescuing the poor and the sick under the name of beitian(悲田) in
ancient China. In Tang China, beitian-yangbingfang(悲田養病坊) was established
in temples and Buddhist monks used to take care of the poor and the sick, paid
for the expenses by the government. Korea and Japan adopted this salvation
system. Dongseo Daebiwon(東西大悲院, Great Mercy Hospital in West and East)
in Goryeo Dynasty was originated from Tang’s beitian-yangbingfang.
Now Korea use the term ‘byung-won(病院)’ as hospital while China calls it
* Director, Korean Institute of Ecological and Environmental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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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iyuan(醫院). The Governmental medical institution used be called ‘yi-won(醫
院, Ch. yiyuan)’ in medieval China and Korea. However modern Japan
preferred the term byo-in(病院) as the translated word for hospital, influenced
by Jesuit missionary. Now according to Korean medical law, the hospital
which has more than 20 inpatients is translated into byungwon and the clinic
which has less than 20 inpatients into yi-won(醫院), because Korean medical
law was greatly influenced by Japan.
Key Words: hospital, infirmary, Buddhist Temple, salvation of the poor,
bi-jeon-won, yang-byung-won, Dong-Seo Dae-bi-won(charity
hospital in East and West), Ancient East Asia, byoin, bingyuan,
yiyuan(醫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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