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숙
윤형숙 尹亨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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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0년 9월 13일 대한제국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창무리 |
사망 | 1950년 9월 28일 대한민국 전라남도 여수시 둔덕동 | (50세)
국적 | 대한제국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 |
학력 | 광주수피아여학교 |
직업 | 독립운동가, 사회운동가 |
상훈 | 건국포장 |
윤형숙(尹亨淑, 1900년 9월 13일 ~ 1950년 9월 28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이다.
생애
[편집]전라남도 여천(麗川) 화양면(華陽面) 창무리(倉武里)에서 윤치운(尹致雲)의 3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이명(異名)은 윤혈녀(尹血女)[1]였다.
1919년 서울을 기점으로 3‧1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났으며, 광주(光州)에서도 3월 10일 장날을 기하여 1,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당시 전라남도 순천(順天)의 성서학원을 졸업하고 광주 수피아여고에 재학 중이던 윤형숙도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는데, 당시 시위대의 맨 앞에 서서 만세를 외치다가 일본 헌병이 내리친 칼에 왼팔이 잘리는 부상을 입었다. 잘려나간 팔이 붉은 피를 뿌리며 땅에 떨어지자 그는 유혈이 낭자한 몸으로 오른팔로 땅에 떨어진 태극기를 주워들고 높이 흔들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윤 열사는 일본 헌병에 체포돼 제대로 치료를 받지도 못하고 가혹한 고문을 받다 오른쪽 눈마저 멀었다. 팔이 잘린 그는 재판정에도 나가지도 못했고 광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궐석재판으로 징역 4개월 형에다 4년 연금형[2]을 더한 판결을 받았다. 이후 혈녀(血女)라는 이름을 얻었다. 학적부와 판결문에도 윤형숙이라는 본명 대신 ‘윤혈녀’로 적혀 있다.[3][4]
감옥을 나와 함경남도 원산(元山) 마루다 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요양을 하기 위하여 전라북도 고창(高敞)에 내려왔다. 그는 고창 유치원에서 6년간 강사를 하였으며, 여수 봉산동(鳳山洞)에 봉산교회가 설립되자 전도사로 일하였으며 교회 내 설립된 봉산(鳳山)학원에서 교원을 맡아 문맹퇴치에 앞장섰다. 이후 여수제일교회를 거쳐 중앙교회의 전도사로 일하던 중 8‧15해방을 맞았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전도사라는 이유로 인민군에게 붙잡혀 9월 28일 여수시(麗水市) 둔덕동(屯德洞) 과수원에서 손양원(孫良源) 목사와 함께 인민군들의 총에 죽음을 당하였다.
사후 바람 노래
[편집]결혼을 하지 않아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 묘는 전라남도 여천군 소라면(召羅面) 관기리(館基里)에 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2004년 건국포장을 였다.
각주
[편집]- ↑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 ↑ 외부와의 접촉을 제한‧감시하고 외출을 허락하지 아니하나 일정한 장소 내에서는 신체의 자유를 허락하는 정도가 비교적 가벼운 감금
- ↑ ‘남도의 유관순’ 윤혈녀[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 “나의 조국 대한민국이여 영원하라, 순국열사 윤형숙” 《국가보훈처 블로그》[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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