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안 (동진)
불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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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道安: 312-385) 또는 석도안(釋道安)은 초기 중국불교를 대표하는 동진(東晉: 317-420) 시대의 고승(高僧)이다.[1]
활동
[편집]도안은 하북성 형수시 기주구의 유교 가문에서 태어나 12세에 출가하여 서역으로부터 온 불도징(佛圖澄: 233-348)을 스승으로 모시고 가르침을 받았다.[1] 스승인 불도징의 사후에는 그를 대신하여 많은 문하생을 지도하였으나 마침 전란시대여서 이 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할 수 없이 허베이성(河北省) · 산시성(山西省) · 허난성(河南省)의 여러 곳을 전전하면서 유랑하였다.[1] 뒤에 혜원(慧遠) 등 400명의 문하생과 더불어 후베이성(湖北省)에 단계사(檀溪寺)를 짓고 엄숙한 구도와 연수를 위주로 하는 교단을 조직하여 국왕과 귀족으로부터 두터운 존경과 신임을 받았다.[1]
379년에는 전진왕(前秦王) 부견(符堅)의 초빙을 받아 장안에 가서 국가의 고문에 추대되었다.[1] 이리하여 명실공히 불교계의 지도자로서 활약하게 되고, 특히 카슈미르 출신의 승가발징(僧伽跋澄) · 승가제바(僧伽提婆), 토카라국의 담마난제 등 외국승을 도와 소승경전의 번역을 완성하였다.[1]
업적
[편집]- 승단생활의 의식과 규범을 새로이 제정하였다. 경전의 강의와 설법의 순서, 부처(佛)에게 공양 하는 방법, 수업의 방법, 참회의 의식 등이 그것이다.
- 당시까지 승려는 출신지나 스승의 이름을 성(姓)으로 하였으나 도안(道安)은 이것을 폐하고 불교는 석존(釋尊)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승은 모두 석(釋)을 성(姓)으로 할 것이라고 주장하여 자신의 이름도 축도안(竺道安)에서 석도안(釋道安)이라고 고쳤다.
- 당시까지 내려오던 격의불교(格義佛敎)의 오류를 반성하고, 불교는 불교 자체의 입장에서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반야경(般若經)》의 여러 다른 번역본을 비교 대조함으로써 참다운 뜻에 이르도록 노력하였다.
- 당시까지의 한역경전(漢譯經典)을 정리하여 《종리중경목록(綜理衆經目錄)》이라는 최초의 한역불경(漢譯佛經)의 총목록을 편찬하였다.
- 경전의 내용은 서분(序分) · 정종분(正宗分) · 유통분(流通分)의 3단계, 즉 3분과로 성립되어 있다고 생각하여 이를 확립하였다. 이 3분과(三分科)의 방법은 후세의 규범이 되었다.
도교에 미친 영향
[편집]도안(道安: 312-385)에 의해 이루어진 한역불경(漢譯佛經)의 수립 · 정리는 도교(道敎)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3] 중국 불교의 체계화 · 조직화에 대항하기 위해서 중국 토착종교측에서도 경전의 수집정리가 필요하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중국 토착종교는 개별로 분산된 종교단체라는 작은 범위를 넘어서 통합되는 경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3] 그 결과 도장(道藏)이라고 하는 도교 경전의 집성이 이루어졌다.[3]
《정통도장(正統道藏)》의 편집 시 적용된 '삼동사보(三洞四輔: 세 개의 중심부과 네 개의 보완부)'라는 편집방침이 이 시기 동안 시간차를 두고 확립되었다.[3] 이 삼동사보라는 관념이 생긴 과정에서 당시에 토착종교측에서 연대의식 내지 일체감이 형성되고 확대된 것을 볼 수 있다.[3] 삼동(三洞)은 4세기말에서 5세기초에 성립되었다.[3] 사보(四輔)는 5세기말에서 6세기초에 성립되었다.[3]
삼동사보라는 관념이 성립될 즈음에 '"도교"(道敎)라는 표현이 최초로 등장했다는 것은 도교의 역사에서 중요한 일이다.[3] 이 말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북위(北魏)의 구겸지(寇謙之: 365-448)로, 그는 도교를 집대성한 사람, 또는 최초의 교단도교(敎團道敎)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