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룻배
나룻배란 나루에서 짐이나 사람들을 실어나르는 배를 통칭할 때 쓰인다. 나루의 규모에 따라 나룻배를 진선(한국 한자: 津船) 또는 도선(한국 한자: 渡船)이라고 불렀다.[1] 조선시대의 경우 수도와 가까웠던 예성강과 한강에 많은 나루터가 있었고, 나룻배의 운용 주체도 정부, 나루, 민간 등 다양했다.[1]
나룻배의 경우 철도의 발달과 도로 교통의 효율성 증대, 교각의 건설 등으로 대부분 원래의 기능을 잃게 되었다.[2] 오늘날 나룻배는 대부분 관광용으로 쓰이고 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유람선이나 수상택시, 연락선이 나룻배의 기능을 계승하고 있다.
기능
[편집]나룻배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은 "도하"(渡河)로, 옛날부터 나룻배는 교각이 없던 지역의 하천, 또는 교각을 놓기 어려운 포구나 강 하류 지역에서 다른 지역을 연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나룻배는 강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육지를 잇는 결절점(結節點)으로, 단거리로 양쪽을 이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점이 컸다.[2] 나룻배의 기능은 나루와 직결되는데 교통수단 이외에도 상업이 발달한 강경포구나 양화진, 삼전도의 경우에는 나룻배가 상선으로, 요새나 군사적 기능을 중시한 남해안 일대의 벽파진, 사천 노량진 등에서는 나룻배가 군함 및 연락선의 역할을 하였다.[2] 특히 고려 및 조선의 경우 해안 및 강변에 조창이 설치되었기 때문에 나룻배가 세곡이나 조운(漕運)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3]
역사
[편집]삼국 시대
[편집]475년 백제가 위례성을 빼앗긴 이후 문주왕은 수도를 오늘날 공주시인 웅진으로 천도했는데, 일부 학자들은 당시 금강 유역이 조운 활동 및 세력 확장에 용이했다는 점을 웅진 천도의 근거로 들기도 한다.[4] 백제뿐만 아니라 고구려가 졸본성에서 압록강 유역의 국내성으로 천도한 이유도 압록강의 수로망 및 육로망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는 견해도 있으며,[5][6] 삼국 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연맹의 수도가 모두 강을 끼고 있었기 때문에 수로를 이용한 교통망 및 주요 연락 체계가 필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볼 때 나룻배는 삼국시대부터 교통 및 연락, 그리고 조운의 기능을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고려 시대
[편집]고려 시대의 경우 나룻배를 모는 뱃사공을 진척(津尺)이라고 불렀으며 이들은 천민층에 속했다.[2] 고려의 경우 건국 이후 12창을 마련해 조운제도를 마련했으며, 고려 성종 때인 992년에는 수경가를 제정해 조운제도를 체계화시켰다. 이후 현종 연간에 12조창으로 조운 기능을 집중시켰고 고려 문종 때 13창으로 조창이 확대되었다. 11세기 중반에는 각 조창의 조운선 숫자를 한정하였고, 수도였던 개경 이북 지역에는 조창이 한 곳만 존재해 제대로 된 조운 활동이 이루어지지 않았다.[2] 고려에서 가장 중요한 나루는 벽란도로, 이 섬은 예성강 하구에 위치하고 있었고 수도인 개성과 가까웠으며 국제 상인들이 무역 활동을 하던 곳이었기에 교통의 요지로 인정받았다.[7]
조선 시대
[편집]경강 (京江)
[편집]조선 시대 한강은 수도가 위치한 강이라는 뜻에서 "경강"(京江)이라고 불렀고, 이에 따라 다양한 도성 인근 한강 지역에는 다양한 진도(津渡)가 마련되어 있었다.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가 나 “나룻배”.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2023년 8월 15일에 확인함.
- ↑ 가 나 다 라 마 권, 태원; 오, 홍석; 최, 래옥. “나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3년 8월 15일에 확인함.
- ↑ “조운”.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3년 8월 15일에 확인함.
- ↑ 김, 영관 (2000). “백제의 웅진천도 배경과 한성경영”. 《충북사학》 (11, 12).
- ↑ 노, 태돈 (1999). 《고구려의 기원과 국내성천도》. 서울대학교 출판부.
- ↑ 금, 경숙 (2003). “고구려 국내성천도의 역사적 의미”. 《고구려발해연구》 (15).
- ↑ 이, 혜은. “벽란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3년 8월 15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