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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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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승
奇大升
조선의 성균관대사성
임금 조선 선조
영의정 이준경
이름
명언(明彦)
고봉(高峰)[1]·존재(存齋)
시호 문헌(文憲)
신상정보
출생일 1527년 11월 18일
출생지 조선 한성부 청파 만리현[2]
사망일 1572년 11월 1일
사망지 정읍 태인
국적 조선
성별 남성
본관 행주(幸州)
부친 기진(奇進)
모친 진주 강씨
형제자매 기대림, 기대절
배우자 함풍 이씨
자녀 기효증, 기효민, 기효맹, 녀(울산 김씨 김남중에게 출가)
친인척 부안 김씨 김점(金坫)
묘소 광산구 광산동 산135
학문 활동
분야 성리학
스승 정희렴 · 김인후 · 이황
주요 제자 정운룡 · 정즐 · 최시망 · 유은 · 이덕홍(이굉중) · 김경생 · 이운홍 · 윤진
주요 저작 《주자문록》, 《고봉집》, 《논사록》
서훈 광국공신 3등 추록
이조판서 추증
월봉서원에 제향

기대승(奇大升, 1527년 12월 21일(음력 11월 18일)~1572년 12월 15일(음력 11월 1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다. 기묘명현인 기준(奇遵)의 조카이며[3] 선산부사 조찬한의 처조부이다.[4]

본관행주이며, 는 명언(明彦), 는 고봉(高峰)·존재(存齋),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퇴계 이황과의 사단칠정(四端七情) 및 이기(理氣) 논쟁을 통해 조선 성리학 수준의 제고에 기여했다. 광주광역시 월봉서원(月峰書院)에 제향되었다.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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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과 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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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7년(중종 22) 11월 18일 한성부 청파 만리현(현. 서울특별시 마포구 공덕동)에서 아버지 경기전 참봉 기진(奇進)과 어머니 진주 강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5]

고려 문하평장사 기순우의 후예로[6], 고조부는 정무공 판중추부원사 기건이고, 증조부는 풍저창부사 기축이며, 조부는 홍문관 부응교 기찬이다. 기묘명현의 한 사람인 기준은 그의 계부(季父)이며, 원나라 혜종기황후[7]는 그의 11대조 기필선의 둘째형 기윤숙의 4대손이다.

부친 기진(奇進)은 동생 기준(奇遵)이 기묘사화에 연루되어[8] 1521년(중종 16) 함경도 온성으로 이배되어 교형(絞刑)에 처하여지자 벼슬할 뜻을 접었다.

1522년(중종 17) 선비 숙인 김씨가 당(堂)에 계셨으므로 과거에 응시하여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그 후 1527년(중종 22) 재상의 천거로 경기전 참봉에 제수 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9]

1528년(중종 23) 선비 숙인 김씨의 상을 당하여 1530년(중종 25) 3년 상을 마치자, 벼슬할 뜻을 버리고 가족들을 데리고 처(妻) 고향인 영광 인근 광주 고룡리 금정 마을로 이사하였다.[10] 이때 이복 셋째형 기원(奇遠)도 함께 낙담하여 인근 장성에 살게 되었다. 이후 행주 기씨호남에 세거하게 되었다.

유·소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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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4년(중종 29) 8세에 선비 진주 강씨(晉州姜氏)가 별세하니 애통함이 성인과 같았다.[11] 9세에 『효경』을 읽고, 『소학』(小學)을 외웠다. 1536년(중종 31) 10세에 부친 물재공을 따라 산사(山寺)에 들어가 글을 읽고 문자를 익혔다.

1537년(중종 32) 11세에 향숙에 나아가 김공집(金公緝)의 밑에서 《대학장구》를 배우고 연구(聯句)를 지었다. 수학 및 육갑과 오행성쇠의 이치에도 정통하였다. 1540년(중종 35) 14세에 부친에게 『사략』을 배워 읽으니 문리가 훤하게 트였다.

1541년(중종 36) 15세에 130구에 이르는 서경부(西京賦)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는데 용산(龍山) 정희렴(鄭希濂)이 글을 보고 칭찬하였다.[12]

1544년(중종 39) 18세 11월에 중종이 승하하고, 이듬해 1545년 7월에 인종이 승하하자 졸곡 때까지 곡을 하고 거친 음식을 먹었다.

혼인과 가정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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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8년(명종 3) 22세에 12월 나주에 사는 충순위 이임(李任)의 딸 함풍이씨와 혼인하였다. 1550년(명종 5) 8월에 큰아들 효증(孝曾)이 출생하였다. 1561년(명종 16) 9월에 둘째 아들 효민(孝閔)이 태어나고, 1572년(선조 5) 2월에 셋째 아들 효맹(孝孟)이 태어났다. 딸은 울산 김씨 사인 김남중(1570~1636)에게 출가하였다.

1555년(명종 10) 29세 정월에 부친 물재공 기진(奇進)의 상을 당하여 여묘살이를 하였다. 3월에 금정동 집 뒤 2리쯤 갑좌 경향에 장례하고 묘기를 지었다.

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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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6년(명종 원년) 20세 가을에 향시의 진사과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이듬해 1547년(명종 2)에 성균관에 유학하였다. 1549년(명종 4) 23세에 식년시 사마 양시에 합격하였다.[13][14]

1554년(명종 9) 28세 봄에 용산(龍山) 정희렴(鄭希濂)의 상에 조문하였다. 가을에 실시된 동당향시(東堂鄕試)에서 장원을 하였다.[15] 1555년(명종 10) 1월에 부친 물재공 기진(奇進)의 상을 당하여 여묘살이를 하였다. 1557년 31세에 주자대전을 발췌하여 『주자문록(朱子文錄)』 3권을 편찬하였다.

관료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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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8년(명종 13) 10월 32세에 식년 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를 제수 받았다. 1562년(명종 17) 5월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 기사관을 임명되었다가 12월 예문관 대교로 자리를 옮겼다.

1563년(명종 18) 3월 승정원 주서에 5월 예문관 봉교 부사정에 임명되었다. 8월 17일 신진사류[16]의 영수로 지목되어 훈구파 및 외척이었던 명종인순왕후의 외삼촌 이량의 주도 하에 삭직되고 문외 출송을 당하였으나, 복재 기준의 아들 종형 기대항의 상소로 복직되었다. 9월 예문관 봉교에 제수되고 이전의 관직을 임명 받았다. 12월 12일 독서당에 선발되어 사가독서를 하였다. 12월 21일 홍문관 부수찬 겸 경영검토관 춘추관 기사관에 제수되었다.

1564년 3월 병으로 수찬에서 체직되고 전적 겸 지제교로를 임명 받았다. 6월 홍문관 부수찬 겸 경연검토관에 임명되었다. 12월 성균관 전적을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565년(명종 20) 병조좌랑, 성균관 직강, 이조정랑에 임명되었다. 이후 교서관 교리를 겸하였다. 낙향하여 12월에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이 광주 북방에 있는 진국원(鎭國院)으로 옮겼는데 찾아가서 뵙고 인심도심설에 대하여 논하였다.

1566년 4월 사헌부 지평에 이어 홍문관 교리에 임명 되었다가, 사간원 헌납, 의정부 검상·사인으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1월 원접사 종사관으로 충용되었다. 이후 사헌부 장령, 의정부 사인, 사헌부 장령에 임명고, 5월 홍문관 응교에 임명 되었다.

1567년(선조 즉위년) 7월에 원접사 종사관이 되어 관서에 가서 명나라 사신을 허국(許國)과 위시량(魏時亮)을 영접하여 도성에 들어왔다. 10월 5일 사헌부 집의에 임명되었다. 10월 23일 입시하여 기묘년 이후의 시비를 가릴 것을 청하고 기묘사화와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죽임을 당한 조광조·이언적 등에 대한 추존을 건의하다.[17] 10월 23일 홍문관 전한 겸 예문관 응교에 제수 되었다. 11월 석강에서 예기를 강하고 사친에게 치제하는 것이 잘못임을 아뢰다. 1568년(선조 1) 2월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영참찬관을 임명되었다가, 4월 병으로 동부승지에서 체직하였다.

1569년(선조 2) 3월 대사간에 제수 되었다. 4월 좌승지에 제수 되었다가 7월 병으로 체직 하였다. 8월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을사위훈을 논할 때 "을사의 녹훈이 위훈이 아닐 뿐더러 또 선왕이 이미 정한 것이니 삭탈할 수 없다"고 하여 삭탈을 주장한 사람들의 반발을 사 9월에 물러났다.[18]

1570년(선조 3) 2월 대신들에게 허물을 입었다 하여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4월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5월 고마산(顧馬山) 남쪽 아래에 낙암(樂庵) 서실을 완성하였다. 10월에 낙향한 면앙(俛仰) 송순(宋純)을 찾아 뵙고 「면앙정기」(俛仰亭記)를 지었다. 12월에 퇴계 이황의 부음을 듣고 신위를 설치하고 통곡하였다.

1571년(선조 4) 4월 홍문관 부제학에 제수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또 9월 이조 참의에 제수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72년(선조 5) 2월 종계변무주청부사에 임명되어 조정에 나가는 도중, 3월에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 되고 종계변무 주문을 썼다. 7월에 공조 참의에 제수 되고 중국에 들어갔다 돌아오는 도중인 9월에 대사간에 제배되었다. 서울에 와서 병으로 체직 하고 10월에 낙향하였다.

유학사 이론에 대한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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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8년(명종 13) 7월 서울에 과거 시험을 보러 가던 도중 장성의 하서 김인후태인의 일재 이항을 배알하고 태극도설을 논하였다.

8월에 서울에서 추만 정지운의 《천명도》를 얻어 보았다. 10월에 서울에 와있던 퇴계 이황을 찾아뵙고 의견을 나누었다.

11월에 휴가를 얻어 귀향하면서 다시 일재 이항을 배알하고 전에 논의했던 것을 재차 논하다가 미처 결과에 이르지 못하였다.[19] 이후 하서 김인후를 배알하고 분별하기 어려움을 들어 질문하니, 하서 김인후가 『이와 기는 혼합되어 있으므로 태극이 음양을 떠나서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도와 기의 구분은 분명하므로 태극과 음양은 일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하며, 하루 내 강론하다 파하였다.

1559년(명종 14) 1월 퇴계 이황의 발송 서를 받아보고, 3월 퇴계에게 저설 및 답서를 올려 사칠이기설을 논변했다. 8월 퇴계에게 편지를 올려 출처와 거취의 의리에 대하여 논하고, 『성정설』을 주장하였다. 10월에 퇴계의 답서 및 변설을 받아 보고, 겨울에 인근에 살던 하서 김인후에게 나아가 매양 이기를 강론하는데, 이황의 『사단칠정 이기호발설』에 대해서 깊이 의심하여 질문하니 하서 김인후가 세밀하게 분석하여 변론을 투철하고 정밀하게 해주었다.

1560년(명종 15) 1월에 세상을 버린 하서 김인후의 영전에 3월 글을 지어 전을 올렸다.[20] 5월에는 서신으로 추만 정지운과 천명도에 대해 논하였다. 8월에는 그동안 하서 김인후로부터 얻은 소득을 바탕으로 「사칠설」 및 「장서」를 저술하여 퇴계 이황에게 드렸으며, 퇴계와 「사칠호발」에 대해 강론할 때 이를 밝히니 수만 언에 이르렀다.

1559년(명종 13)부터 1566년까지 퇴계 이황과 8년간에 걸쳐 이루어진 사칠이기논쟁의 서신이 유명하다. 이것이 세상에 전하는 '퇴계ㆍ고봉'의 「사칠 왕복서」이다. 이 논쟁은 조선 유학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논쟁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때 그는 이황의 '이기이원론'에 반대하고 '사단칠정이 모두 다 정(情)이다'고 하여 '주정설'을 주장했다.

1566년(명종 21) 그동안 하서 김인후로 부터 얻은 전설(前說)을 다 버리고, 결론에서 형식적으로 퇴계 이황의 설에 자신의 설을 합치시키며 이황을 스승으로 받들었다. 후대에 이러한 그의 행동은 논리의 일관성을 잃어 버리게 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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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0년(선조 3) 2월에 낙향하였다. 4월에 다시 대사성에 제수 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할 수가 없어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후 고마산 남쪽 아래에 서실 낙암을 짓고 살면서 학문에 전념했는데, 제자가 되어 따르는 이들이 많았다.[21] 10월 7일 관직을 사임하고 낙향한 담양송순을 찾아뵙고 「면앙정기」(俛仰亭記)를 지었다. 12월 8일 퇴계 이황이 별세하였다는 부음을 듣고 신위를 설치하고 통곡하였다.

1571년(선조 4) 1월에 안동 도산에 사람을 보내어 퇴계 이황의 영전에 조문하였다. 4월에 홍문관부제학 겸 경연수찬관과 예문관직제학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9월에 이조 참의에 제수 되었으나 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572년(선조 5) 2월에 종계변무주청부사에 임명되어 조정에 나가는 도중, 3월에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 되고 종계변무 주문을 썼다. 7월에 공조 참의에 제수 되고 중국에 들어갔다 돌아오는 도중인 9월에 대사간에 제배 되었다. 서울에 와서 병으로 체직하고 10월에 낙향하였다.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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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2년(선조 5) 10월 3일에 낙향하던 중 10일 천안에 도착하였는데 볼기에 종기가 발병하였다. 15일에 정읍 태인에 도착하니 병이 극심하여 관사에 머물며 치료하였다. 25일 병이 위독해 지자 사돈 매당 김점(金坫)이 황급히 찾아와 할 말을 물으니, 관사에서 죽을 수 없다 하며 사돈집으로 가기를 재촉하니 28일 저녁 무렵에 도착하였다. 선조가 병세가 위중함을 듣고 특별히 어의와 약을 내려보내 병을 구완케 하고 어찰을 보내어 위문하도록 하였다.[22]

1572년(선조 5) 11월 1일 정읍 태인에서 46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이듬해 2월 8일 나주 북쪽 오산리 통현산 너부실 언저리에(현재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동 산135 묘좌 유향) 안장하였다.

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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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로는 정운룡 · 정즐 · 유은 · 최시망 · 이덕홍[23] · 김경생 · 이운홍 · 윤진 · 박규 · 곽호 · 이함형 · 이유원 · 박대봉 · 정휴 등이 있다. 최경회 · 고경명 · 정철 등도 찾아와 사사(師事) 하였다.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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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증조부: 기축(奇軸)
  • 증조모: 해주 정씨
    • 조부: 기찬(奇襸)
    • 조모: 파평 윤씨 - 첨추 윤준원의 딸
      • 백부: 기형(奇逈)
      • 백부: 기괄(奇适)
      • 백부: 기원(奇遠) - 금강 기효간의 조부
    • 조모: 안동 김씨 - 사의 김수형의 딸
      • 숙부: 기준(奇遵) - 기대항의 아버지
      • 아버지: 기진(奇進)
      • 전어머니: 남양 방씨
      • 어머니: 진주 강씨 - 강영수의 딸
        • 부인: 함풍 이씨
          • 장남: 기효증(奇孝曾, 1550~1616)
            • 손자: 기정헌(奇廷獻, ?~?)
            • 손녀: 조찬한(趙纘韓)에게 출가
            • 손녀: 한이겸(韓履謙)에게 출가
          • 차남: 기효민(奇孝閔 ,1561~1597) - 정유재란 때 졸
            • 손자: 기영헌(奇齡獻, 1581~1655)
            • 손자: 기동헌(奇東獻, 1584~1647)
          • 삼남: 기효맹(奇孝孟, 1572~1597) - 무후
          • 장녀: 울산 김씨 사인 김남중[24]에게 출가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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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봉집》
  • 《주자 문록》
  • 《논사록》
  • 《왕복서》
  • 《이기왕복서》등

학문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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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릴 때 김공집(金公緝) · 용산(龍山) 정희렴(鄭希濂)에게 수학하고, 성장하여서는 하서 김인후 · 일재 이항 · 퇴계 이황 문하에 출입하여 선학(先學)들을 놀라게 하는 새로운 학설을 많이 제시하였다.
  • 특히 퇴계 이황과 8년 간에 걸쳐 사칠이기논쟁(四七理氣論爭)은 조선 유학사에 깊은 영향을 끼친 논쟁으로 유명하다. 이후 퇴계 이황도 그의 이론을 상당 부분 받아들여 따르게 되었다.
  • 고전에 능통하고, 문학으로 이름을 떨쳤다. 문장에도 재주가 뛰어나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주문(奏文)을 썼다.
  • 사암(思菴) 박순(朴淳) · 회재(懷齋) 박광옥(朴光玉) · 월계(月溪) 조희문(趙希文) · 금강(錦江) 기효간(奇孝諫) ·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 등과 교유하였다.

포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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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90년(선조 23)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녹훈되고, 정헌대부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 경연의금부 성균관 춘추관사에 추증되고, 덕원군(德原君)에 봉해짐
  • 1646년(인조 24) 문헌(文憲)의 시호 추증(追贈)
  • 1884년(고종 21) 문묘 종향 상소 - 불허

서원 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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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건립 및 제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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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78년(선조 11) 장남 함재 기효증(奇孝曾) 선친 위업을 기리기 위해 고마봉(叩馬峯) 아래 낙암(樂菴. 현 광산군 신룡동)가에 사우(祠宇) 망천사(望川祠)를 창건하고 제향함[25]
  •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피해 입음
  • 1646년(인조 24) 사우 망천사를 망월봉(望月奉) 아래 동천(桐川. 현 광산구 광산동 광곡 마을)으로 이건
  • 1654년(효종 5) 8월 유림들의 소청(疏請)으로 월봉(月峯)이라 사액이 내려짐
  • 1655년(효종 6) 4월 예조낭관 원격(元格) 제문을 받들고 와서 치제함
  • 1669년(현종 10) 월봉서원을 중창함. 사우(祠宇)·동재(明誠齋)·서재(存省齋)·강당(忠信堂)을 건립. 사액 서원으로서의 규모를 갖춤
  • 1671년(현종 12) 문간공 눌제 박상, 문충공 사암 박순 이향(移享)
  • 1683년(숙종 9) 문원공 사계 김장생 추가 배향
  • 1693년(숙종 19) 나주 경현서원 추가 배향
  • 1769년(영조 45) 문경공 신독제 김집 추가 배향
  • 1788년(정조 12) 4월 예조좌랑 박흥복(朴興福) 명을 받들어 치제함

서원 훼철 및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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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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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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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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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호 고봉(高峰)은 선조들의 관향인 행주의 속현 고봉(高峯)에 고봉산(高峰山)이 있는데 이곳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2. 기대승 년보에 전라도 광주목 소고룡면 송현동(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 출생이라 한다.
  3. 정홍명, 《기암집》 권10, 고봉 기선생 행장
  4. 박세채, 《남계집》 권74, 승정원 좌승지 조공 묘갈명
  5. 기대승의 연보에는 1527년 광주 광산구 소고룡리(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기대승이 찬한 '현고장사랑경기참봉 기부군 묘기'에 한양에서 태어나신 부친 기진(奇進)은 1527년(중종 22) 재상의 천거로 경기전 참봉에 제수되고, 이듬해 1528년(중종 23) 모친 숙인 안동 김씨 상을 당하여 3년상을 마치자, 벼슬을 버리고 가솔들을 데리고 광주 고룡리 금정 마을로 이사하여 살게 되었다고 하였다.
  6. 기순우는 기대승의 13세조이다.
  7. 친정 아버지는 기자오이다.
  8. 정암 조광조를 종유하며 뜻을 같이하는 신진 사림들의 세력 확장과 위훈 삭제에 불만을 품은 남곤, 심정, 홍경주, 김전 등이 1519년(중종 14) 조광조, 김정, 김구, 김식, 윤자임, 기준, 박세희, 박훈 등 핵심 인물들을 몰아내어 죽이거나 귀양을 보낸 사건이다.
  9. 1526년 장남 기대림(1526~1565)이 태어나고, 1527년 11월 차남 기대승(1527~1572)이 태어났으며, 1529년 삼남 기대절(1529~1567)이 태어났다. 이후 1531년에 사남 소과가 태어나고, 1532년에 오남이 태어났으며, 1532년에 딸이 태어났으나 사남 이하는 모두 요절하였다,
  10. 현재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 고룡마을
  11. 사과 강영수(姜永壽)의 딸이며, 의정부좌찬성 강희맹(姜希孟)의 증손녀이다.
  12. 용산 정희렴은 서경부(西京賦)를 읽고 평가하기를 "그 글을 읽어 보면 그 사람을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니, 그 명성이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퍼지겠다. 생각이 심원하고 기상이 장대하며 어조가 고상하고 문장이 통창하다. 비록 간간이 서툴고 껄끄러운 데가 있기는 하나, 단지 이것은 조그마한 흠일 뿐이다. 조금만 더 진취하면 곧 옛 작자(作者)의 경지에 이를 것인데, 더구나 그 밖의 과문(科文)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축하할 뿐이다.……” 하였다.
  13. 생원시 2등 15위, 진사시 2등 17위로 합격하였다.
  14. 1551년 25세 알성시에 합격할 수 있었는데 기묘명현의 한 사람인 복재 기준의 조카라는 사실을 안 당시의 시험관 윤원형이 그의 이름을 꺼려하여 하등의 점수를 주어 낙제하였다고 한다.
  15. 3년마다 가을에 각 도에서 실시하는 시험이다.
  16. 신진사류는 박소림, 기대승, 윤두수, 이문형(李文馨), 허엽, 윤근수 등을 말한다.
  17. 양재역 벽서사건 : 지난날 윤원형을 탄핵한 바 있는 송인수(宋麟壽), 윤임 집안과 혼인 관계에 있는 이약빙(李若氷)를 사사하고, 이언적(李彦迪)·정자(鄭磁)·노수신(盧守愼)·정황(鄭熿)·유희춘(柳希春)·백인걸(白仁傑)·김난상(金鸞祥)·권응정(權應挺)·권응창(權應昌)·이천계(李天啓) 등 20여명을 유배 하였다.
  18. 영의정 이준경과의 불화로 해직 당했다.
  19. “지난번 서로 강구할 때에는 각자의 주장이 서로 달랐습니다. 태극은 이(理)와 기(氣)를 겸한다고 말한 것은 선생의 요지였고, 저는 천지만물(天地萬物)의 이치를 들어 태극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른바 ‘태극’이라는 것은 다만 이일 뿐이어서 기와는 관련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하루종일 갖가지로 반복해서 논쟁하였지만 그 요점은 이것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20. 제문(祭文):경신년 3월 7일 후학 고봉 기대승은 삼가 주과(酒果)로써 근자에 작고하신 하서 선생 영정에 올리며 아뢰옵니다. 아아 선생이시여 이 지경에 이르셨단 말입니까, 은미(隱微)한 성언(聖言)을 장차 뉘가 들어 찾아내며, 후학들을 장차 뉘가 들어 깨닫게 하오리까. 너무 하옵니다. 우리 도가 쇠퇴함이여! 세상에 어찌 다시 선생 같으신 분이 계시오리까. 제가 병으로 인해 고향에 돌아온 것은 선생에게 의지하여 의혹난 폐혹(蔽惑)을 제거하리라 바라고 있었사온데,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를 줄을 뉘 일렀겠사옵니까, 어찌하여 하늘도 믿지 못할 것이 이와 같단 말입니까. 아아! 선생께서 진택(眞宅. 유택)으로 돌아가시리니 이제는 종유(從遊)의 즐거움과 사모하고 우러르던 소회는 이로서 마지막이라, 어찌하오리까. 어찌하오리까. 공경히 한 잔을 올리오며 영결종천(永訣終天)하옵니다 아! 슬프옵니다.
  21. 이유원, 유은, 정즐, 최시망 김경생, 박규, 박대봉, 윤진, 이덕홍(이굉중), 이운홍 등
  22. 어의 오변(吳忭)이 오는 도중에 있었으나 미처 도착하지 못하여 그를 구원하지는 못하였다.
  23. 일명 이굉중
  24. 하서 김인후 손자
  25. 전라감사 황강 김계휘(金繼輝)가 강진의 언답 30여 석지를 서원으로 넣어 주는 등 협조가 있었다. 그 후에 송강 정철(鄭澈)이 전라 감사가 되어 또한 많이 돌보아 주었고 노비와 전토도 지급해 주었다.
  26. 빙월당(氷月堂) 당호(堂號)는 정조가 내린 빙심설월(氷心雪月)에서 차용한 것으로 기대승의 고결한 학덕을 비유한 것이라 한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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