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내동
산내동 山內洞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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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자 표기 | Sannae-dong |
행정 | |
국가 | 대한민국 |
지역 | 대전광역시 동구 |
행정 구역 | 37통, 179반 |
법정동 | 낭월동, 대별동, 이사동, 대성동, 장척동, 소호동, 구도동, 삼괴동, 상소동, 하소동 |
관청 소재지 | 대전광역시 동구 산내로 1326 |
지리 | |
면적 | 50.39 km2 |
인문 | |
인구 | 20,398명(2022년 3월) |
세대 | 7,823세대 |
인구 밀도 | 404.8명/km2 |
지역 부호 | |
웹사이트 | 산내동 행정복지센터 |
산내동(山內洞)은 대전광역시 동구에 속한 행정동으로 충남 금산군 추부면과 경계를 이루며 동쪽에는 충북 옥천군 군서면 그리고 서쪽에는 대전광역시 중구와 접하고 있다. 식장산과 만인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도·농지역으로 근교농업이 발달하였다.
역사
[편집]산내동은 백제 때는 우술군, 신라때는 비풍군 고려초기에는 회덕현, 현종 9년(1668) 이후에는 공주부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회덕현에 속하였다. 조선시대 말기 고종 32년(1895)에는 회덕군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외남면의 대별리 일부와 응전리를 병합하여 구도리라 하고 대전군 산내면에 편입되었다가 1935년 11월 1일 대전부 신설에 따라 대덕군에 편입되고 1989년 1월1일 대전직할시에 편입되었다. 현재 행정동은 산내동이며 10개의 법정동이 있다.
산내 학살사건
[편집]대전형무소 학살 사건 - 산내에서 옥천으로 가는 곤룡터널을 지나기전에 있는 낭월동 곤룡골에서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대전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사상범 및 재소자들을 학살한 사건이 일어났다.[1]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군경은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복역수, 예비검속자, 보도연맹원을 학살했다. 1950년 6월 28일경부터 7월 17일 사이에 진행된 '피의 살육제'에서 대전형무소 재소자와 대전·충남지역 보도연맹원 1800~3000명(최대 7천명까지 추정)이 학살되었다.
산내학살사건의 주범은 심용현이었다. 심용현 중위는 대전형무소 정치범을 산내 골령골로 끌고가 '사격 개시' 명령을 내리는 등 소위 1, 2차 골령골 학살을 지휘하고 점검하는 핵심 역할을 했다. 그 결과 1950년 6월 28~30일경 산내 보도연맹원 1400여 명과 1950년 7월 초에 형무소 재소자 1800여 명을 합쳐 모두 3200여 명이 학살됐다. 결론적으로 그의 손에서 32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볼 수 있다.[2]
그는 1954년 12월 중령으로 예편한 후 성신학원 이사장을 4차례 역임했고, 1986년 4월 사망했다.[3]
이후 1950년 7월 북한군이 점령한 이후 조사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참여했던 군경이 투옥되었고 이후 9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퇴각하던 북한군에 의해서 또 다른 살육이 집행되었다.
골령골 학살사건 조사[4]
법정동
[편집]- 낭월동(朗月洞)
- 대별동(大別洞)
- 이사동(二沙洞)
- 대성동(大城洞)
- 장척동(長尺洞)
- 소호동(小好洞)
- 구도동(九到洞)
- 삼괴동(三槐洞)
- 상소동(上所洞)
- 하소동(下所洞)
주거
[편집]- 대한주택공사
- 석천들마을 주공 (낭월동) - 2004년 11월 입주 / 홍인건설㈜
학교
[편집]각주
[편집]- ↑ 고미, ‘대전 산내 학살 사건 정부에 의한 정치적 살인’ 공식 확인 , 제민일보
- ↑ “[단독] "심용현 전 성신학원 이사장, 민간인 학살 주범" 입증 문서 발굴”. 오마이뉴스. 2019년 6월 4일.
- ↑ “[박만순의 기억전쟁] 주저하는 부하 다리에 사격... 3200명 학살하고 승승장구한 군인”. 오마이뉴스. 2019년 6월 4일.
- ↑ “과거사 -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 사건”. 2024년 11월 11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