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제

명나라의 6대 황제

명 영종 정통제 → 천순제(明 英宗, 1427년 11월 29일(음력 11월 11일) ~ 1464년 2월 23일(음력 1월 17일))는 중국 명나라의 제6대 황제(재위 1435년 ~ 1449년, 복위 1457년 ~ 1464년)이다. 기진(祁鎭)이다. 명 왕조 사상 첫 복위를 한 황제로, 정통(正統)의 연호를 사용하였다가, 복위 후에 천순(天順)으로 개원하였다. 명나라는 일세일원제(一世一元制), 즉 한 황제마다 하나의 연호만을 사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명나라 황제 중, 유일하게 복위하여 연호를 개원하였으므로 혼란을 피하기 위해 묘호인 명 영종(明英宗)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선덕제(宣德帝)의 장남이며, 경태제(景泰帝)의 이복형이다. 어머니는 효공장황후 손씨(孝恭章皇后 孫氏)이다. 묘호는 영종(英宗)이며, 시호는 법천입도인명성경소문헌무지덕광효예황제(法天立道仁明誠敬昭文憲武至德廣孝睿皇帝)이다.

명 영종
明 英宗
제6대 대명 황제(복위)
재위 1457년 2월 11일 ~ 1464년 2월 23일
즉위식 천순(天順) 원년 1월 17일
(1457년 2월 11일)
전임 경태제(景泰帝)
후임 성화제(成化帝)
대명국 태상황제
재위 1449년 9월 22일 ~ 1457년 2월 11일
제6대 대명 황제
재위 1435년 2월 7일 ~ 1449년 9월 22일
즉위식 선덕(宣德) 10년 1월 10일
(1435년 2월 7일)
전임 선덕제(宣德帝)
후임 경태제(景泰帝)
대명국 황태자
재위 1428년 2월 20일 ~ 1435년 2월 7일
즉위식 선덕(宣德) 3년 2월 6일
(1428년 2월 20일)
전임 선덕제(宣德帝) 주첨기(朱瞻基)
후임 성화제(成化帝) 주견심(朱見深)
이름
주기진(朱祁鎭)
묘호 영종(英宗)
시호 법천입도인명성경소문헌무지덕광효예황제
(法天立道仁明誠敬昭文憲武至德廣孝睿皇帝)
능호 유릉(裕陵)
연호 정통(正統) 1436년 ~ 1449년
천순(天順) 1457년 ~ 1464년
신상정보
출생일 선덕(宣德) 2년 11월 11일
(1427년 11월 29일)
사망일 천순(天順) 8년 1월 17일
(1464년 2월 23일)
부친 선덕제(宣德帝) 주첨기(朱瞻基)
모친 효공장황후(孝恭章皇后) 손씨(孫氏)
배우자 효장예황후(孝莊睿皇后) 전씨(錢氏)
효숙황후(孝肅皇后) 주씨(周氏)

9살의 어린나이에 즉위했으며 정치에 무관심하고 무능하였다. 섭정인 조모 성효소황후가 1442년에 사망한후 자신의 어릴적 선생이었던 환관 왕진에게 국정을 일임해버렸다. 환관이 실권을 잡고 국정을 농단하자 명나라는 혼란에 빠졌다. 1449년에는 몽골족의 침입을 막고자 영종이 친정을 나갔다가 황제가 적국에 생포당하는 중국역사상 전례없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환궁후 태상황이 되어 사실상 유폐된채 지내다가 1457년에 복위되었으나 특별히 내세울만한 업적은 없고 궁녀들의 순장제도를 폐지한게 전부라 할 수 있다.[1]

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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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5년 선덕제가 죽자, 9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명나라 황제가 되었다.[2] 정통제의 나이가 어렸으므로 황제의 조모인 태황태후 장씨(太皇太后 張氏, 성효소황후)가 섭정을 하고 양명(楊榮), 양사기(楊士奇), 양부(楊溥)를 비롯한 선대의 충신들에 의해 안정된 정국을 이끌어 나갔다. 그러나 충신들이 연로하여 차례로 사망하고 태황태후마저 1442년에 사망하자 환관 왕진(王振)이 권력을 잡고 전횡을 일삼았다.[3] 권력을 잡은 직후 가장 먼저 왕진이 한일은 명태조 주원장이 환관억제책의 실행을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환관의 정치 간여금지'를 천명하며 궁문에 세워놓은 철패를 부셔버렸다.[4][5]

정통제는 아직 나이가 어리고 경험도 부족한데다가 정치에도 관심이 없었기에 왕진(王振)을 총애하며 국정을 맡겨 버렸다. 권모술수에 능했던 왕진은 내시 양성기관인 내서당의 출신으로, 학식이 뛰어나서 정통제의 황태자 시절에 교육을 담당했었다. 정통제가 즉위후에 사례감의 우두머리 태감이 되었고,[6] 측근으로서 황제를 보좌하며 문서를 대필하는등의 직무를 수행하였는데, 문서를 조작하는등 전횡을 행하고 국정을 농단했다. 이후 명나라는 환관의 전횡과 폐단으로 여러 차례 파국을 맞게 된다.

토목의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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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 왕진의 전횡과 더불어 명나라 초기의 안정적인 조정은 해이해지기 시작했고, 1449년에는 몽골계 부족인 오이라트(Oirāt)가 세력을 형성하고 무역의 확장을 위해 명과 교섭하였으나 여러 차례 결렬되자 오이라트족의 족장 에센은 명나라 변방에 침입하였다. 이에 환관 왕진(王振)은 정통제에게 직접 친정(親征)을 간청했으나 이부상서와 병부상서는 친정을 만류했다. 하지만 정통제는 왕진의 건의를 받아들여 오이라트족을 친정하고자 50만의 군대를 이끌고 북진했으나, 50만 명의 군사중에는 문신(文臣), 귀족(貴族) 등 전쟁과 무관한 이들을 포함시켜 군대의 규모를 과시하였다.

전투에서 비정예군이 오이라트족에게 대패하였음에도 여러 군신들의 말을 듣지 않은 채 왕진이 국정을 농단하였다. 이들의 패전 소식은 북경(北京) 조정에 큰 충격을 주었고, 남경(南京) 천도설이 나왔지만 병부시랑 우겸(于謙)이 "남쪽으로 도망하여 멸망한 (宋, 960년 ~ 1279년)의 예를 못 보았느냐며 북경은 천리이므로 사수하여야 한다" 라고 강력히 주장하여 조정을 안정시켰다.

한편 에센족은 명군의 수급로를 차단하고 연승하였으나 환관 왕진은 이 와중에도 신하들의 충고를 무시하는 등 전횡을 일삼다가 피살당하였으며, 결국 에센군은 토목보를 포위하여 정통제를 잡아갔다. 중국 역사상 외적과의 전쟁 중 황제가 포로로 잡혀 간 것은 정통제가 처음이다. 이 사건을 토목의 변이라고 한다.

몽골로 끌려간 정통제는 몽골인들로부터 뿔없는 말, 소같은 자라며 조롱당했다. 몽골 황금사에 의하면 에센 타이시는 정통제에게 몰로 자카토라는 여자를 주고, 모코르 세구세(뿔 없는 마소 같은 노복)라는 별명을 지어준 뒤, 욘시예부부의 아산 사미의 노예로 주어졌다.[7]

황제를 포로로 잡아간 에센 타이시는 전세의 유리함을 알고, 명과의 교섭을 시작하려 하였으나 북경 조정은 정통제의 이복동생인 경태제(景泰帝)를 새로운 황제로 옹립한다. 에센족은 포로로 잡은 정통제가 협상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자 아무런 조건 없이 1450년에 명나라 조정에 송환했다.[8] 하지만 이미 이복동생인 경태제가 즉위하여 황제가 되었으므로 정통제는 태상황(太上皇)이 되었으나 궁에 유폐되었다.

탈문의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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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태제가 정통제를 유폐시키자 조정은 정통제를 중심으로 하는 파와 경태제를 중심으로 하는 파로 나뉘었다. 경태제는 본래 황태자였던 그의 아들 성화제를 폐하고, 자신의 아들을 황태자로 책봉하였지만 그는 병으로 죽고 만다. 1457년에 병을 앓는 도중 정통제를 중심으로 하는 일파가 정변을 일으켜 경태제는 폐위되었고, 폐위된 지 한 달 후에 급사하였다. 정통제는 천순제라는 이름으로 복위에 성공했다.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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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부모와 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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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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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호 시호 이름(성씨) 재위년도 생몰년도 국구(장인/장모) 별칭 비고
황후(皇后) 효장예황후
(孝莊睿皇后)
전씨(錢氏) 1442년 ~ 1449년
1457년 ~ 1464년
1426년 ~ 1468년 전귀(錢貴)
포씨(包氏)
[9]
귀비(貴妃) 효숙황후
(孝肅皇后)
주씨(周氏) (추존) 1430년 ~ 1504년 영국공(寧國公)
주능(周能)
영국부인(寧國夫人)
견씨(甄氏)
[10] [11]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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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호 시호 이름(성씨) 생몰년도 국구(장인/장모) 별칭 비고
신비(宸妃) 장정안목신비
(靖莊安穆宸妃)
만씨(萬氏) 1432년 ~ 1468년 만취(萬聚)
혜비(惠妃) 단정안화혜비
(端靖安和惠妃)
왕씨(王氏) 1429년 ~ 1485년 왕빈(王彬)
범씨(范氏)
숙비(淑妃) 장정안영숙비
(莊靜安榮淑妃)
고씨(高氏) 1429년 ~ 1511년
덕비(德妃) 공단장혜덕비
(恭端莊惠德妃)
위씨(魏氏) 1426년 ~ 1469년 위충(魏忠)
장씨(張氏)
순비(順妃) 공화안정순비
(恭和安靜順妃)
번씨(樊氏) 1414년 ~ 1470년
안비(安妃) 장희단숙안비
(莊僖端肅安妃)
양씨(楊氏) 1414년 ~ 1487년 양백안(楊伯顔)
장씨(張氏)
현비(賢妃) 소숙정단혜비
(昭肅靖端賢妃)
왕씨(王氏) 1430년 ~ 1474년
경비(敬妃) 정순의공경비
(貞順懿恭敬妃)
유씨(劉氏) ? ~ 1463년 혜비(惠妃)
여비(麗妃) 안화영정여비
(安和榮靖麗妃)
유씨(劉氏) 1426년 ~ 1512년 유림(劉林)
진씨(陳氏)
소비(昭妃) 단장소비
(端莊昭妃)
무씨(武氏) 1431년 ~ 1467년 무관(武寬)
화비(和妃) 공안화비
(恭安和妃)
궁씨(宮氏) 1430년 ~ 1467년 궁순(宮純)
공비(恭妃) 소정공비
(昭靜恭妃)
유씨(劉氏) ? ~ 1500년
현비(賢妃) 소의현비
(昭懿賢妃)
이씨(李氏)
장비(莊妃) 공정장비
(恭靖莊妃)
조씨(趙氏) 1446년 ~ 1514년 조지(趙智)
오씨(吳氏)
성비(成妃) 공희성비
(恭僖成妃)
장씨(張氏) ? ~ 1504년
충비(充妃) 희각충비
(僖恪充妃)
여씨(余氏)
여비(麗妃) 혜화여비
(惠和麗妃)
진씨(陳氏) ? ~ 1500년
정비(貞妃) 영정정비
(榮靖貞妃)
왕씨(王氏) 1427년 ~ 1507년 왕청(王淸)

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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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호 시호 이름 생몰년도 생모 자식 별칭 비고
장남 황태자(皇太子) 주견준(朱見濬)
주견심(朱見深)
1447년 ~ 1487년 효숙황후 주씨 14남 6녀 기왕(沂王) 제8대 황제 성화제(成化帝).
차남 덕왕(德王) 장(莊) 주견청(朱見淸)
주견린(朱見潾)
1448년 ~ 1517년 정장안목신비 만씨 3남 영왕(榮王)
3남 주견식(朱見湜) 1449년 ~ 1451년 정장안목신비 만씨 요절함.
4남 허왕(許王) 도(悼) 주견순(朱見淳) 1450년 ~ 1453년 단정안화혜비 왕씨 요절함.
5남 수왕(秀王) 회(懷) 주견주(朱見澍) 1452년 ~ 1472년 장정안영숙비 고씨 1녀
6남 숭왕(崇王) 간(簡) 주견택(朱見澤) 1455년 ~ 1505년 효숙황후 주씨 3남
7남 길왕(吉王) 간(簡) 주견준(朱見浚) 1456년 ~ 1527년 정장안목신비 만씨 1남
8남 흔왕(忻王) 목(穆) 주견치(朱見治) 1458년 ~ 1472년 정장안목신비 만씨 조졸함.
9남 휘왕(徽王) 장(莊) 주견패(朱見沛) 1462년 ~ 1505년 공단장혜덕비 위씨 6남

황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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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호 이름 생몰년도 생모 부마 별칭 비고
장녀 중경공주
(重慶公主)
1446년 ~ 1499년 효숙황후 주씨 주경(周景) 대장공주(大長公主)
차녀 가선공주
(嘉善公主)
? ~ 1499년 단정안화혜비 왕씨 왕증(王增) 대장공주(大長公主)
3녀 순안공주
(淳安公主)
정장안목신비 만씨 강희후(康僖侯)
채진(蔡震)
대장공주(大長公主)
4녀 숭덕공주
(崇德公主)
? ~ 1489년 장희단숙안비 양씨 양위(楊偉) 장공주(長公主)
5녀 광덕공주
(廣德公主)
주연상(朱延祥) 1454년 ~ 1484년 정장안목신비 만씨 번개(樊凱) 장공주(長公主)
6녀 의흥공주
(宜興公主)
? ~ 1514년 공단장혜덕비 위씨 마성(馬誠) 대장공주(大長公主)
7녀 융경공주
(隆慶公主)
1455년 ~ 1480년 장정안영숙비 고씨 유태(游泰) 장공주(長公主)
8녀 가상공주
(嘉祥公主)
? ~ 1483년 황비 유씨 황용(黃鏞) 장공주(長公主)
9녀 공주
(公主)
공단장혜덕비 위씨 요절함.
10녀 공주
(公主)
공화안정순비 번씨 요절함.

기년과 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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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 사용기간 년수 비고
정통(正統) 1436년 1449년 14년
천순(天順) 1457년 1464년 8년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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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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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강정만 <명나라 역대황제평전> 주류성출판사 2017년 p180
  2. 강정만 <명나라 역대황제평전> 주류성출판사 2017년 p162
  3. 강정만 <명나라 역대황제평전> 주류성출판사 2017년 p165
  4. 박영규 <환관과 궁녀> 김영사 2004 p140
  5. 강정만 <명나라 역대황제평전> 주류성출판사 2017년 p166
  6. 강정만 <명나라 역대황제평전> 주류성출판사 2017년 p163
  7. 역주 몽골 황금사, 119페이지
  8. 강정만 <명나라 역대황제평전> 주류성출판사 2017년 p175
  9. 자의황태후(慈懿皇太后)
  10. 성자황태후(聖慈皇太后)/성자태황태후(聖慈太皇太后)/효숙예황후(孝肅睿皇后)
  11. 사후 황후로 추존.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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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
아버지 선종 선덕제 주첨기
제6대 명나라 황제
1435년 ~ 1449년
후임
이복동생 대종 경태제 주기옥
전임
이복동생 대종 경태제 주기옥
제6대 명나라 황제 (복위)
1457년 ~ 1464년
후임
장남 헌종 성화제 주견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