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비오 1세
교황 비오 1세(라틴어: Pius I, 이탈리아어: Pio I)는 제10대 교황이다. 사후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축일은 7월 11일이다.
비오 1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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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 140년 |
전임자 | 히지노 |
후임자 | 아니체토 |
개인정보 | |
출생이름 | 비오 |
출생 | 1세기 말엽 로마 제국 아퀼레이아 |
선종 | 155년 로마 제국 로마 |
생애 초기
편집비오는 ‘경건한’이란 뜻이다. 비오 1세는 1세기 말엽에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아퀼레이아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졌다.[1] 《교황 연대표》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는 ‘루피누스(Rufinus)’라고 하며, 역시 아퀼레이아 태생이라고 한다.[2]
2세기 문헌인 《무라토리의 카논》[3]과 《리베리오 교황표》[4]에 따르면, 비오 1세는 신약성서 위경인 《헤르마스의 목자》의 저자인 헤르마스와 형제 사이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헤르마스는 자신의 저서에서 자신이 과거에 노예 신분이었다고 고백하였다. 이를 근거로 헤르마스와 비오 1세는 본래 노예였다가 해방되어 자유민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교황
편집비오 1세는 2세기 중엽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치세 동안 교회를 이끌었다고 전해진다.[5] 그는 예수 부활 대축일은 오직 주일(일요일)에만 거행되어야 한다는 지시를 내렸다고 전해진다. 그렇지만 이 기록의 출처인 《교황 연대표》는 6세기 초가 되어서야 비로소 편찬되었기에 역사적 신빙성은 부확실하다.[6] 비오 1세는 또한 산타 푸덴치아나 성당을 건립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 성당은 오늘날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 가운데 하나이다.
비오 1세는 재위기간 내내 힘겨운 시기를 보냈다. 왜냐하면 그가 교황으로 있을 당시 로마에서는 성 유스티노가 기독교 교리를 가르치는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발렌티누스와 케르돈, 마르키온 등의 영지주의를 신봉하는 이단자들이 활동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큰 문제를 일으켰으므로 비오 1세는 발렌티누스, 케르돈, 마르키온 등을 단죄하며 그들을 파문하였다.[7]
비오 1세가 로마에서 순교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는데, 그 이유는 성무일도의 초기 판본에 그가 순교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1969년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인 달력이 개정될 때 조사한 바에 의하면, 비오 1세가 순교했다는 명확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순교자라는 칭호를 제거하였다.[8] 《로마 순교록》도 마찬가지로 비오 1세를 순교자로 기록하고 있지 않다.[9]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Lives of the Saints, For Every Day of the Year," edited by Rev. Hugo Hoever, S.O.Cist.,Ph.D., New York: Catholic Book Publishing Co., 1955, p. 263
- ↑ Ed. Duchesne, I, 132.
- ↑ Ed. Preuschen, "Analecta, 1," Tubingen, 1910.
- ↑ Ed. Duchesne, "Liber Pontificalis, I, 5."
- ↑ "Lives of the Saints, For Every Day of the Year," 263쪽
- ↑ "Dictionnaire historique de la papauté", Philippe Levillain, Fayard 1994, p. 1042–1043"
- ↑ "Dictionary of Saints" (First Image Books Edition, April 2005 ISBN 0-385-51520-0), 505쪽.
- ↑ "Calendarium Romanum" (Libreria Editrice Vaticana, 1969), 129쪽.
- ↑ "Martyrologium Romanum" (Libreria Editrice Vaticana, 2001 ISBN 88-209-7210-7)
전임 히지노 |
제10대 교황 140년 ~ 155년 |
후임 아니체토 |